초판본 이무영 작품집
2671호 | 2015년 7월 7일 발행
흙냄새가 심장까지 기어들 때
오양호가 엮은 ≪초판본 이무영 작품집≫
흙냄새가 심장까지 기어들 때
신문기자 도시 인텔리는 고향과 아버지를 생각한다.
귀농하여 농민과 친구가 되고 봄이면 아내와 보리밭을 맨다.
아버지가 판 논을 되찾으면서 흙의 노예 사상을 확인한다.
농민은 자연의 순교자다.
“수택이가 하로 이틀 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는 하는 일 없이 교외를 빈들빈들 돌아다니었다. 하로는 S라는 동료를 유인해 가지고 청량리로 나갔다. 전부는 아니나 그만둘 게획만을 이야기하고 생게로 이야기가 옮아갔을 때다. 그도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낸지 몰랐었다. 매키−한 냄새가 코로 콕 찔른다. 그 냄새는 코를 통해서 심장으로 깊이깊이 기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흙내었다.”
<제1과 제1장>, ≪초판본 이무영 작품집≫, 이무영 지음, 오양호 엮음, 44쪽
냄새가 어떻게 심장에까지 미치는가?
수택은 농민을 업신여기고 자기 아버지를 “비웃고 가엽게 여겼”다. 그러나 흙내를 맡는 순간 “집으로 가 흙을 만지는” 것이 진실하고 값진 삶임을 깨닫는다.
수택의 처지는 어땠나?
왜 사는지, 누구를 위해 사는지도 모르고 방황할 때였다. 신문사 일에 쫓기면서도 “한 달 가야 한 번 건들여 주지도 않는 원고지”를 보고,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회의에 빠져 있었다.
흙으로 돌아가는가?
서울 생활을 접고 귀농한다. 코피를 쏟으며 농사일을 배워 농민들과 친구가 되고, 추운 겨울 저녁 도둑을 지키기 위해 순라도 돈다. 봄이면 아내와 보리밭을 매고, 쟁기질을 배워 논도 간다.
아버지를 인정한 것인가?
아버지가 판 논을 되찾으면서 아버지 같은 농민이야말로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짜 농민이 된다.
아버지의 세계는 무엇인가?
‘흙의 노예’ 사상이다. “농사는 이해타산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농사짓는 순간만은 신선의 심정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다.
이무영의 다른 작품처럼 1930년대 말이 배경인가?
그렇다. 일본이 조선 농업을 식량 공급, 원료 조달, 상품 판매를 위한 시장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식민지 정책을 위해 토지조사 사업을 벌이며 농토를 빼앗던 시기다.
그의 농민소설은 무엇이 다른가?
소작농 문제를 다루면서 흙에 대해 순교자와 같은 삶의 태도를 지녔던 농부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농민들의 건실한 생활상과 흙에 집착하는 혼을 통해 한 시대 한국인의 의식을 검증·추출했다.
그에게 ‘흙의 노예’인 농민은 어떤 사람들인가?
흙을 떠나지 않고, 흙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농본주의 사상이 종교의 경지를 이룬다. 땅의 너그러움과 여유·포용을 배워 더불어 살고, 베풀고 인종하는 삶에 가치를 둔다.
한국문학사에서 농민소설은 언제 나타나는가?
1920년대 중반이다. 이익상의 <흙의 세례>, 김동인의 <시골 황서방>, 이기영의 <농부 정도룡>, 최서해의 <농촌야화>, 현진건의 <고향> 등이다. 초기의 농민소설은 대개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1930년대는 어떤가?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가 당시 불길같이 일어나던 ‘브나로드운동’을 소설로 구현했다. 이기영의 ≪고향≫은 소작농과 지주의 대립을 테마로 삼아 투쟁형 농민소설로 나타났다. 그 뒤 보수형 농민소설, 이농형 농민소설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농민문학론이 작품을 뒷받침하고, 논리를 개발하며 문단 전면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30년대 중·후반은 농민문학 시대가 되었다.
이무영 작품에서 농민소설의 위치는?
초기 작품은 경향문학의 성격을 띠었다. 장편 ≪먼동이 틀 때≫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뒤 곤비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식민지 농민의 실상을 다루는 작가로 변모했다. 광복 이후에는 여성의 애정풍속소설을 많이 썼다. 이런 소설은 대중성이 강해, 중기의 농민소설이 거둔 문학적 성과에 이르지 못한다. 이무영을 농민소설가라 부르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08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1925년 도일, 고학을 하다가 소설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의 서생으로 작가 수업을 한다. 1927년 19세 때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을 출간하고, 이듬해 <폐허의 울음>을 발표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1929년 귀국, 소학교 교원, 출판사, 잡지사 직원으로 지내면서 작품을 발표했다. 1939년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경기도 군포로 귀농해 실제로 농사를 지으며 농민소설을 썼다. 대학에서 소설론을 강의하기도 했고, 6·25 때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1960년 뇌일혈로 타계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오양호다. 문학평론가이고 정지용기념사업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