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해동고승전 천줄읽기
2447호 | 2015년 2월 12일 발행
신라의 두 엘리트 집단
여성구가 뽑아 옮긴 김대문·각훈의 ≪화랑세기(花郞世紀)/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천줄읽기≫
신라의 엘리트, 화랑과 승려
선교를 따르는 무리를 화랑이라 하고 불교에 귀의한 무리를 승려라 했다.
이로부터 재상과 장수가 나고 이곳으로 왕과 왕자가 들어갔다.
신라를 만든 두 엘리트 집단은 융합하여 삼국을 통일한다.
“옛날 선도들은 신을 받드는 일을 주로 했지만 이후에 국공들이 차례로 이를 행한 후 도의로써 서로 권하고 격려하여,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화랑세기/해동고승전 천줄읽기≫ 김대문/각훈 지음, 여성구 옮김, 24쪽
선도가 누구인가?
仙徒, 곧 선교를 따르는 무리다. 이들이 화랑이다.
선교는 무엇인가?
신라에서 사람들을 교화하던 가르침이다. 풍류도(風流道)라고도 부른다.
화랑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중국 연나라에서 미인들을 양성하던 ‘국화(國花)’ 풍습이 우리나라에서는 ‘원화(源花)’로 자리를 잡았다. 법흥왕의 딸인 지소 태후가 이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해 사람들에게 받들게 했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법흥왕이 총애한 위화랑의 이름에서 비롯했다. 화랑의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는데, 위화랑이 1세 풍월주가 되었다.
풍월주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나?
12세 풍월주인 보리공은 원광법사의 동생이며, 14세인 호림공은 자장율사의 아버지다. 15세는 김유신, 18세는 김춘추다.
≪화랑세기≫는 그들의 전기인가?
1세 위화랑부터 32세 신공까지 서른두 명의 출생과 혈통, 행적을 다룬다. 그 밖에 540년에서 681년까지 활약한 화랑 중 약 140명이 등장한다. 화랑의 조직과 활동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믿을 만한 이야기인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아 고대사 연구자들은 획기적인 자료로 반기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창작된 소설로 보는 견해가 팽팽히 맞선다.
진위논쟁은 끝을 보았는가?
김대문이 지은 원본은 현재 찾을 수 없고, 한학자인 남당 박창화의 필사본만 전한다. 진위 논쟁은 명쾌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이 책에서 같이 엮은 ≪해동고승전≫은 어떤 책인가?
고려 때 승려 각훈이 왕인 고종의 명을 받아 편찬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승전이다. 현재는 두 권짜리 필사본만 전한다.
≪해동고승전≫도 원본이 없나?
발견되지 않았다. 최남선과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의 필사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들 역시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이 필사본 2종을 저본으로 삼은 필사본 5종이 있다.
내용은 무엇인가?
권1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그 수용에 대한 기록이고, 권2는 중국과 인도로 구법의 길을 떠났던 승려들의 기록이다.
어떤 승려들이 실려 있나?
불교에 귀의해 이름을 법공(法空)이라고 한 법흥왕, 역시 스스로 머리를 깎고 법운(法雲)이라고 한 진흥왕은 권1에서, 원광법사와 안함, 혜업 등은 권2에서 볼 수 있다. 원본은 불교 전래 초부터 약 9세기 동안의 고승을 망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화랑세기≫와 ≪해동고승전≫을 한데 엮은 이유는 무엇인가?
화랑과 승려는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상호 보완의 존재였다. 그들 모두 선교와 불교의 융화를 위해 노력했다. 두 집단을 함께 살펴볼 때 진정한 선불의 조화를 이해할 수 있다.
선불의 조화는 어디에서 볼 수 있나?
호림공은 낭도들에게 “선교와 불교는 함께 갖추어야 할 하나의 도”라고 천명했다. 원광은 아우인 보리공에게 자기는 부처가 되고 아우가 신선이 되면 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으리라 했다. 원광의 세속오계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신은 이 책을 얼마나 발췌해 옮겼나?
≪화랑세기≫에서 40%, ≪해동고승전≫에서 60%를 뽑아 한 권으로 합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여성구다.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