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재 작품집
2559호 | 2015년 4월 27일 발행
강신재 소설이 부정하고 부정하는 것
이성천이 엮은 ≪초판본 강신재 작품집≫
오빠를 사랑한다
포기하면 일상의 평화, 추구하면 사회의 질책이 따른다.
강신재의 태도는 선명하다.
사랑에 죄의식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절망을 만나면? 공상이 시작된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이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옴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이샤쓰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꿉을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
<젊은 느티나무>, ≪초판본 강신재 작품집≫, 강신재 지음, 이성천 엮음, 25쪽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
오빠다. 부모가 재혼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인연은 어디로 가는가?
“‘오빠’, 그는 나에게는 그런 명칭을 가진 사람이었다”라는 현실과 “현규를 사랑하는 일 가운데에 죄의식은 없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었다”라는 사랑의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현실과 욕망의 갈등, 종착점의 모습은?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이다. 숙희와 현규의 사랑이 긍정될 것임을 예고한다.
긍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과 사랑에 관한 기존 질서를 전면 부정하고 저항한다는 뜻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의 소재였다. 한국 사회의 관습과 규범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이었다.
문단은 뭐라고 했나?
“이전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소설적 양태와 새로운 연대에의 지향을 드러낸 매우 중요한 작품” 혹은 금기시된 “감정의 좌절을 그리면서도 정갈하고 깨끗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주인공의 안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는 소설 기법상의 효과”라고 했다.
강신재 소설의 특징은?
서정과 감각의 문체, 사랑과 성이 매개하는 현실 부정과 사회 비판 의식, 여성의 정체성 탐구, 여성의 고유성 회복 의지가 눈에 띈다. 인물과 대상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여성 작가의 섬세한 감각으로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밀도 높게 그려내는 실력은 발군이다. 현실의 보편 가치 질서를 넘어 인간의 본원적 정체성과 낭만적 사랑의 ‘진실’을 추구한다.
낭만적 사랑의 또 다른 진실에는 무엇이 있는가?
<황량한 날의 동화>에는 사랑이 동화 속 환상임을 깨닫는 여주인공 명순이 등장한다.
명순에게 사랑의 실체는 무엇인가?
결혼 전 한수에게 느꼈던 자극적인 사랑의 감정이란 하찮은 시정(詩情)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꿈꾸는 ‘완전한 인생’, 그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낭만적 초월의 세계, 혹은 동화 속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무엇이 변한 것인가?
한수의 매력, 곧 ‘고민에 싸인 사나이의 어두운 매력’이 ‘분노’와 ‘짜증’의 감정을 거쳐 점차 환멸로 바뀌어 간다. 그녀의 삶에도 점점 더 무기력한 일상과 황량한 나날들이 지속된다.
한수의 ‘어두운 매력’은 무엇인가?
결혼 전 명순은 아편 중독자 한수를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고 있’는 남자로 생각한다. 가족사로 인해 ‘감정의 부당한 학대’를 겪고 ‘실의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그의 모습에서 ‘남자의 겸허함’을 발견한 것이다. 한수에게 ‘꽤 적극적으로 접근’해 그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명순의 환상은 어떻게 깨지는가?
결혼이라는 현실에서 한수의 겸허함은 무능함의 다른 이름이었음이 확인된다. 그 남자의 ‘완전한 형태’는 눈먼 사랑이 지어낸 ‘과장’과 ‘우상 만들기’에 다름 아니었다.
환상이 깨진 후의 명순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자신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감정마저 포기한다. 가령, “한수로 인한 분노라든가 짜증 같은 것은 언제나 오래가지 않았”고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못한다.
절망하는가?
명순은 절망하는 방법도 잊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죽음에 대한 공상이다. 작품의 곳곳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이나 사후의 세계를 ‘공상’한다.
절망하는 방법조차 잊은 자에게 죽음은 어떤 모습인가?
“모든 종류의 고뇌가 한꺼번에 폭발을 한 것 같은 색채와 모양”을 하고 있는 화가 미로의 복제화가 명순의 방에 걸려 있다. 작품 도입부에서 들려오는 ‘수녀의 합창’에서 명순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연상한다.
강신재는 어떤 작가인가?
박경리, 손소희, 한무숙 등과 더불어 1960∼1970년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다. 1949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문예≫ 지에 <얼굴>과 <점순이>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데뷔 이후 1994년에 상재한 역사소설 ≪광해의 날들≫에 이르기까지 90여 편의 중·단편과 30여 편의 장편 등 도합 12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성천이다. 경희대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