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김붕구가 옮긴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남자의 시대
집 대신 세계가 있었다. 애인 대신 친구가 있었고 동료 대신 동지가 있었다. 일정한 직업 없이 항상 바빴지만 언제나 목숨을 건 결단이 기다리고 있었고 세상의 인정 대신 역사의 망각을 만날 뿐이었다. 그곳에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레볼루션이 있었다.
“청산가리를 줄게. ‘절대로’ 두 사람 몫밖에 없으니 그리 알아.”
‘오직 두 사람 몫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나서 그 밖의 모든 것을 그는 이미 단념했다. 옆으로 누워 청산가리를 둘로 나누었다. 등불은 보초들로 가려져 불빛이 후광처럼 흐릿하게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놈들이 움직이지나 않을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볼 수는 없었다. 카토프는 자기 목숨보다도 더 귀중한 선물을 자기 가슴 위에 내민 그 뜨거운 손에-육체에게 주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에게 주는 것도 아니다-넘겨주었다. 그 손이 짐승처럼 움찔 오므라들더니 곧 물러갔다. 카토프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기다렸다. 갑자기 둘 중의 한 사람이 뭐라고 말했다.
“잃어버렸어. 떨어졌어!”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지음, 김붕구 옮김, 509~510쪽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죽음인가?
체포된 여러 동지들이 죽음의 순번을 기다린다. 하나하나 끌려 나가 기관차 화통 속에 산 채로 처넣어지고, 그때마다 증기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카토프 옆에 중국인 동지 쏸과 이름 모를 젊은이가 있다. 젊은이는 울고, 쏸은 공포로 헛소리를 지른다. 카토프는 가지고 다니던 청산가리 2인분을 쏸에게 주면서 2인분이라고 알린다.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말로는 이 작품으로 공쿠르를 받았나?
출세작이다. 1927년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을 축출을 위해 만든 상하이 쿠데타가 무대다. 첸, 기요, 카토프 등 주인공의 죽음을 그렸다.
앙드레 말로는 누구인가?
그는 20대에 프랑스 망명 중인 트로츠키와 이데올로기와 예술에 관해 논쟁했다. 드골 만년에 유일한 말상대이기도 했다. 네루,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같은 높이, 같은 깊이, 같은 넓이의 대화를 나눈 인간, 현대사의 거인이다.
그는 어떤 문학을 만들었나?
그의 등장인물은 거의 모두가 조국을 떠나거나 국적 의식을 상실하고 사회에서 부동하는 존재다. 가정이나 남녀의 사랑도 드문 일이다. 전통적인 일체의 연줄을 끊어 버린 고립된 인간군이다.
≪인간의 조건≫의 주인공 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정복자≫의 고아 테러리스트 홍의 심화된 캐릭터다. 어릴 때부터 돌본 지조르 노인의 평가를 빌리면 첸은 철두철미 이념에 몰입함으로써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난 중국인이다.
지조르-기요 부자, 기요-메이 부부의 가족은 무엇으로 연결되는가?
지조르는 프랑스인, 죽은 부인은 일본 여인, 그 사이에서 출생한 기요는 혼혈아, 그의 처 메이는 상하이에서 출생한 독일 여인이다. 메이가 혁명 진영의 병원 의사로 근무할 뿐, 부자는 일정한 직업이 없다.
그들은 어떤 관계인가?
이념가인 아버지와 행동가인 아들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이념 분신이다. 남편과 아내도 마찬가지다. 기요에게 메이는 병든 동지를 돌보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혁명 동지다. 부부는 혁명을 안과 밖에서 수행하는 행동 분신이다.
그에겐 사랑보다 이념이 더 중요한가?
자기 삶의 의미를 혁명에 걸고 있는 기요에게 혁명 이념을 떠난 아버지나 아내는 있을 수 없다. 설사 있다 치더라도 이 작품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다.
혁명가에게 부부는 무엇으로 부부인가?
메이가 시가전의 처참하고 허망한 광경에 충동적 자극을 받고 다른 남자와 동침했다고 기요에게 말한다. 이 고백은 기요에게 어떤 표면적인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는 그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심연이 발생한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역사와 실존은 같지 않다는 것을 말로는 지적한다.
부부 사이에 자식이 생긴다면 문제가 달라지지 않을까?
이 한 쌍 간에 아기가 없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말로에게 아기를 가진 혁명 동지 부부란 처음부터 상정 불가능한 혈연관계다. 에멜리크 일가를 보라.
에멜리크는 누군가?
어린 시절부터 이틀에 한 번씩 결석하고 알코올 중독의 편모 아래서 성장한 그는 공장, 직공, 입대, 영창, 전쟁, 독가스, 제대, 인도차이나를 거쳐 상하이까지 흘러들었다. 실향·부동·고립의 인간이다. 중국인 루위쉬안과 함께 축음기상을 운영해 호구지책을 삼고 있다. 그의 아내는 12달러로 팔려갔다 버려진 뒤 먹고 자기 위해 그의 가게에 굴러들어온 빈민 중국 여인이다. 가스 중독의 후유증을 앓는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다가 마침내 아기까지 낳게 된다.
그는 이 소설에 어떻게 등장하는가?
혁명 진영의 상하이 봉기가 성공하자 장제스가 입성해 무기 반납령을 내린다. 혁명 진영은 초긴장 상태에 빠진다. 첸은 장 사령관 암살을 결의하고 동지 두 명과 폭탄을 준비한다. 밤이 될 때까지 에멜리크 집에서 잠복하려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처자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친구 간의 정의와 행동가들의 동지애다. 카토프는 얼굴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그의 마지막 희망인 독약을 동지에게 넘긴다.
말로의 실제 삶이 이랬는가?
말로의 혈연·가족 관계는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우정과 동지애는 전설적이었다. 드골과 함께 정계를 깨끗이 떠남으로써 세인을 놀라게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붕구다.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가르쳤다.
제자가 당신의 번역에 대해 뭐라 했는지 아는가?
모른다.
뭐라 했는가?
오생근이 이렇게 말했다.
지드, 카뮈, 말로, 루소 등 불문학사에 중요하게 평가되는 많은 현대 작가들의 원서를 역시 풍부한 우리말을 구사하는 개성적인 문체로 정확하게 번역함으로써, 선생님은 불문학을 널리 전파한 외국 문학자로서뿐 아니라 번역자가 갖춰야 할 능력과 책임감 있는 정신을 일깨워 준 분으로서도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감은?
쑥스럽지만 기쁘다.
이 대담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내가 쓴 앙드레 말로와 <<인간의 조건>>에 대한 논문을 출판사의 편집자가 인터뷰 방식으로 재편집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