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규 동화선집
강정규가 짓고 오태호가 해설한 ≪강정규 동화선집≫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이야기를 잃고 광고 카피를 얻었다. 노래를 잃고 광기를 얻었다. 마을을 잃고 지하철을 얻었다. 할머니를 잃고 스마트폰을 얻었다. 똥을 잃고 비데를 얻었다. 나는 대체 뭔가?
어떻든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그것이 나를 조금도 기쁘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겨울 날씨 푹한 것도 한 부조인데….”
어른들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애의 옷이라고는 얇고 짧은 검정 치마와 무명 저고리 한 벌뿐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중략)
남향받이 잔디밭에 불을 놓고 쬐는데, 한 아이가 마른 쇠똥을 주워 왔습니다. 말똥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바짝 마른 쇠똥과 말똥에 불이 붙으면 꺼지지 않고 오래 탔습니다. 그 위에 돌멩이를 올려놓고 후우, 입바람을 불었습니다. 쇠똥과 말똥은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새빨갛게 불빛을 냈습니다.
“쇠똥에 구운 돌멩이는 오래오래 따뜻한 겨.”
“말똥에 구운 돌멩이는 더 오래간다구.”
아이들이 아는 척 말했습니다.
구워진 돌멩이를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알돌멩이를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쥐면서 뛰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책보는 아예 어깨에 메거나 허리에 동여맸습니다. 나도 돌멩이 하나를 얻어 가지고 아이들과 신나게 신작로를 달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애한테 돌멩이를 구워 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이튿날부터 나는 성냥을 챙기고 마른 쇠똥과 말똥, 그리고 동그랗고 예쁜 돌멩이에 눈이 팔렸습니다.
동구 밖 산모퉁이에서 쇠똥불이나 말똥불에다 돌멩이를 구우며 그 애를 기다립니다. 그 애가 저만치 나타나면 구운 돌멩이를 종이에 싸 들고 앞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불쑥 내밀면,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나란히 걸어갑니다.
≪강정규 동화선집≫, <돌>, 강정규 지음, 오태호 해설, 6~9쪽
‘그 애’는 가난 때문에 양조장 집에 보내진다. 가혹한 현실이 아이들에게 필요한가?
평론가 오태호의 말을 빌리자. “6·25전쟁이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전쟁이 낳은 고통과 가난이 아동들에게 혹독한 시련이 됨을 보여 준다. 다리를 저는 목수집 딸과 소년의 우정을 다룬 이 동화에서 소년은 ‘구운 돌멩이’를 아이에게 전하고 ‘그 애’는 ‘참나무 팽이’를 선물하는 것에서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준다. 가난 탓에 양조장 집에 보내지는 ‘그 애’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소년 화자의 아픔이 따뜻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전쟁 통에 가족이 해체되는 가운데 비극을 배경에 깔면서도 그 비극을 극복할 가능성으로서 따뜻한 인간애에 착목하고 있다.”
전쟁과 분단은 당신 작품에서 무엇을 하는가?
<엿>에서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손자를 돌보며 가르침을 준다. <구장집 머슴>에서는 환상 속에서나마 통일이 되는 상상을 보여 준다. <마음으로 여는 길>에서는 월남한 이요한 할아버지가 부산행 열차에서 이북에 두고 온 딸을 생각하면서 뼈만 앙상한 젊은 여성 환자를 등에 업는다. 이런 때 분단은 극복해야 한다든지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념을 다루는 소재가 아니다.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깔려 있으면서 일상 속 약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 연민 의식을 그리는 소재다.
<행복한 별나라>는 나우루 공화국의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인가?
나우루 공화국 사람들은 인광석 채굴로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하지만 끝없이 소비만 하다 망하고 말았다. <행복한 별나라>에서 ‘행복한 섬나라’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새똥바위’만 믿고 산다. 30년 후 섬은 ‘쓰레기 산’이 된다. 노동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하는 우화다.
우화는 당신의 작품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어떻게 기능하는가?
<이야기가 된 꽃씨>에서 꽃씨는 염소의 먹이가 되고 꽃씨를 먹은 흑염소는 할머니의 보약이 된다.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련성을 다룬 우화다. <별이 된 다람쥐>는 가족의 소중함을 환기하는 우화다. 교훈은 아동문학의 한 축일 수 있다. 하지만 교훈에 치중하다 보면 교조적이고 도식적인 결말이 나올 수 있다. 우화는 옛날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레 삶의 교훈을 내면화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전통적 정서를 환기한다.
오태호는 ‘중후한 신인’이란 말로 당신을 표현했다. 동의하는가?
“아동 주체의 관찰자적 시선과 세계 인식을 섬세하게 포착함으로써 동화문학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모색한다”는 면에서 그런 표현을 썼다. 흉잡히면 언짢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단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중후한 신인’이란 말이 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새로움을 모색한다는 의미인 것 같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이현주는 “강정규 글에서 할머니와 똥 얘기가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말했다. 설명할 수 있는가?
내게 ‘할머니와 똥’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키워드다. 충남 보령군 오천면 갈현리 589번지는 얼마 전 행정구역상 명칭만 군에서 시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산골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히신 선산 밑이며 내 호적지이기도 하다. 이곳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 ≪다섯 시 반에 멈춘 시계≫는 “똥이 귀한 거름이던 시대에서 똥이 그야말로 똥이 되는 시대로 넘어오는” 시기를 그린다. 내가 작품에 담는 소망은 초지일관 ‘인간 회복’이다. ‘잃어버린 고향’은 ‘잃어버린 인간성’에 다름 아니다. 난 항상 ‘할머니와 똥’이 그립다.
변해 버린 고향은 무엇을 잃은 고향인가?
고향 집들은 언제부턴가 초가나 와가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위아래채 사랑채에서 단독주택으로, 집집이 다름없이 주택 구조가 바뀌었다. 부엌은 입식이 되었고, 화장실도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바뀐 건 주택 구조만이 아니다. 그만치 인간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얘기다. 매년 5월 첫 주말이면 고향 마을 큰 소나무 밑에서 ‘문중의 날’ 행사가 있다. 처음 제정된 20여 년 전만 해도 출향인과 재향인이 1년 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날, 너나없이 가슴 두근거리며 하루 전에 내려가 4촌이나 6촌네, 혹은 종손댁 사랑방에 모여 밤새 어울렸다. 이제는 조상님이 남겼다는 어디 어디 땅값이 많이 올랐는데 그것 팔아 피차 나눠 갖는 게 어떻겠느냐는 토론을 진지하게 나누는 자리로 바뀌었다.
당신 글밭의 토양은 무엇인가?
아버님은 생전에 “글쟁이는 조석거리가 간 데 없다”고 하시며 내가 문학 쪽으로 진로를 잡아 갈 때 탐탁히 여기지 않으셨다. 일찍이 내 둔재를 간파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할머님은 누구보다 손자를 사랑하셔서 어려서부터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그것이 훗날 내가 글밭을 일구는 데 필요한 토양이 되었다.
문단 생활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69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방화>가 당선됐다. 1973년 첫 창작집인 ≪아가의 꿈≫을 출간했다. 1974년 ≪소년≫에 이원수 선생의 추천으로 소년소설 <돌>을 발표했다. 1975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선>과 <운암도>가 안수길 선생에게 추천받았다. 논픽션과 창작집으로 시작해, 소설과 동화 창작을 병행하다가 이제 동시까지 쓰는 아동문학 작가로 남았다.
10년간의 청소년 야학 운동이 동화에 전념하는 데 영향을 미쳤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엄혹했던 그 시절 체험에 지금까지도 가슴이 떨려 언젠가는 소설로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손을 못 대고 있는 형편이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한국 아동 문학은 무엇이 부족한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대개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 같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옛날 읽었던 것을 다시 읽었으면 좋겠다. 사실 살아 있는 한 어제의 나는 이미 오늘의 내가 아니다. 자신을 과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 고백인지 모르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늙은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 먹은 사람 중에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지만 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란 보수와 진보를 가리키나?
대충 그렇다. 그들 사이의 벽을 고민하다가 시작한 게 아동문학 계간지 ≪시와 동화≫다. 우리 잡지는 그 벽이 없다.
≪시와 동화≫를 발행한 지 10년이 넘었다. 왜 만드나?
기름 행주로 몇 년을 두고 아침저녁 문질러 윤기 내고, 대물려 밥 짓고 국 끓이던 무쇠솥이 그리운 시대다. 가스레인지에 포르르 라면이나 끓이는 냄비 같은 시류가 안타깝다. 시와 동화를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같은 길을 가는 우리가 보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하자는 뜻을 이어 가고자 한다.
냄비 같은 시류를 사는 작가 지망생에게 할 말이 있는가?
지금은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고, 우리는 노래를 잃어버린 세대다. 이야기를 잃은 대신 광고 카피와 넋두리를 얻었다. 노랫소리를 잃은 대신 광기와 소음을 얻었다. 이야기와 노래에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의미를 잃어버리고 잡다한 일에 허둥대며 향방 없이 달려간다.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확장시킨다. 기존의 사물을 재해석하게 만든다. 상호 이해와 관계를 조성한다. 그래서 인간 회복의 첩경이 된다. 노래 또한 마찬가지다. 동화의 원형은 이야기고, 시의 원형은 어울려 부르는 노래가 그 근간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강정규다. 동화작가다. ≪시와 동화≫ 발행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