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록(思辨錄) 천줄읽기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장윤수가 뽑아 옮긴 <<사변록(思辨錄) 천줄읽기>>
군자의 도는 무엇인가?
주희는 용과 체라 했다. 박세당은 낮고 높은 것 또는 가깝고 먼 것이라 했다. 어느 것이 분명한가? 어느 것이 확실한가? 어느 것이 실천 가능한가?
오늘날 육경(六經)을 연구하는 이들은 모두 얕고 가까운 것을 뛰어넘어 깊고 먼 것으로 달려가고 거칠고 소략한 것은 소홀히 하고 정세(精細)하고 완전한 것만 엿본다. 하여 저들이 미혹에 빠져 소득이 없는 것은 이상할 바 없다.
≪사변록 천줄읽기≫, 박세당 지음, 장윤수 옮김, 26쪽
미혹에 빠지지 않고 학문하여 소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박세당이 주장한 방법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다. 유가의 학문 방법은 쉬운 데서 어려운 데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박세당은 어떤 사람인가?
17세기 후반,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에 대항해 자각적 삶을 산 지조 있는 학자다. 40대가 되어 벼슬하려는 뜻을 버리고 양주 석천동으로 퇴거해 강학과 고전 연구에 몰두했다. 주희의 경전 해석에 불만을 품고 더 현실적이고 실감 나는 해석을 전하고자 했다.
그가 연구한 고전은 어떤 것들인가?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상서≫를 비롯해 미완성으로 남은 ≪시경≫이다. 나름대로 주해하여 전체 14책으로 저술했다.
이미 전하는 유교 경전을 그가 다시 쓴 이유가 무엇인가?
경전 대부분이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겪고 복원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전부터 의미와 맥락이 통하지 않는 착간처(錯間處)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미와 문맥, 장절(章節)의 편차(編次)까지, 전통 시각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했다.
왜 주희의 해석에 불만을 품은 것인가?
≪중용≫의 “君子之道, 費而隱” 구절에서 비(費)와 은(隱)을 주희는 형이상학적 개념인 용(用)과 체(體)로 풀었다. 박세당은 이 해석이 경전의 근본 취지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그 두 자를 뭐라고 새겼는가?
‘비’는 ‘낮고 가까움’, ‘은’은 ‘높고 심원함’이라 보았다.
박세당이 맞고 주희가 틀린 것인가?
군자의 도는 처음에는 낮고 가까운 데 있지만 극에 이르면 성인도 알지 못하는 바가 있을 만큼 심원하다. 그러나 그 깊고 먼 신경지는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낮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연구를 극진히 해야 비로소 이를 수 있다. “멀리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고 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行遠必自邇, 登高必自卑)”는 구절과도 통한다.
그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도 이 책 때문인가?
출간 직후에는 별 말이 없었다. 다만 교유하던 윤증(尹拯)이 학문 태도에 대해 가볍게 지적했을 뿐이다. 그러다 이 책이 주자를 모욕했다고 문제가 된 것은 그의 나이 74세 때인 1702년이었다. 그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으면서 일이 커졌다.
이경석의 비문에 뭐라고 썼단 말인가?
이경석과 송시열(宋時烈)의 관계를 말하며 송시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당시 조정을 주도하던 송시열계 노론에게 당한 것인가?
그들은 비문을 비판하며 ≪사변록≫을 문제 삼았다. ‘주자를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박세당은 삭탈관직을 당했다. 박세당과 송시열은 이미 1664년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문제로 논란이 불거져 반목이 시작되었다.
박세당과 송시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에 그 피해 가족으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은 청나라 사신이 올 때 해직을 청원해 사신을 피하는 것이 통례였다. 당시 수찬 김만균(金萬均)도 피해 가족이었으므로 면직을 소청했으나 도승지 서필원(徐必遠)이 그것을 막았다. 이때 송시열을 비롯한 신하들 대부분은 서필원을 탄핵했으나 박세당이 옹호했다.
해직 반대의 이유는 무엇인가?
청나라가 아무리 원수라 해도 이미 임금이 그들을 영접하기로 한 이상 자리를 피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송시열과 그를 따르는 숭명배청론자들의 반론은 무엇이었나?
박세당을 ‘다섯 명의 사악한 무리[五邪]’ 중 하나라고 맹비난했다.
그래서 석천동에 내려간 것인가?
“능력이 부족해 세상에 유익한 일을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 또한 날로 퇴폐해져 바로잡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원인은 송시열과의 갈등인 듯하다.
이 책도 그곳에서 썼나?
퇴거 직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연구 결과는 1680년부터 1693년, 그의 나이 52세부터 65세 때까지 나왔다.
당신은 이 책을 어떻게 발췌했는가?
<대학편>과 <중용편>에서 30%를 골라 뽑았다.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 주자의 해석과 뚜렷한 차이가 있는 곳을 뽑았다.
당신은 누구인가?
장윤수다.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