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유머 단편집
이영범이 골라 옮긴 ≪체호프 유머 단편집(Ю мористические рассказы А. П. Чехова)≫
그때나 지금이나 웃겨
술, 권위, 치맛바람, 성과 성, 이름 이야기, 군대 회고록 그리고 요즘 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어디서나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체호프의 필치라니, 웃어 볼 만하다.
‘돼지 새끼 같은 그놈 때문에 사할린으로 가다니, 이것도 현명한 짓은 못 돼’라고 시가예프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유형 간다면, 그년이 재혼할 가능성을 갖게 돼. 그렇게 되면, 그년이 좋아 자빠져 으스대면서 두 번째 남편을 맞을 테지… 그러니, 그년도 살려 두고, 나도 죽지 말고, 그놈도… 역시 살려 두는 게 낫겠어. 더 현명하고 혹독한 방법을 궁리해야겠어. 그것들을 모욕해서 벌을 주고, 이혼 수속을 밟아서 추문을 세상에 폭로하는 거야….’
“므시외, 또 다른 신형 권총이 있습니다”라고 점원이 장에서 한 다스의 신형 권총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뇌관에 특수 장치가 돼 있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중략)
그는 점원의 얼굴 표정을 보지 않았으나, 다소 면목이라도 세울 양으로 다른 물건이라도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을 살까? 그는 무엇이든 값이 싼 것만을 고르며, 상점의 벽을 두루 살폈다. 이윽고 그는 문가에 걸린 풀빛 그물에 시선을 멈추었다.
“저… 저건 뭐죠?” 하고 그가 물었다.
“메추라기 잡는 그물입니다.”
“얼마죠?”
“8루블입니다, 므시외.”
“싸 주시죠….”
<복수자>, ≪체호프 유머 단편집≫, 안톤 체호프 지음, 이영범 옮김, 204~206쪽
돼지 새끼 때문에 메추라기가 되는 이야기인가?
시가예프는 바람난 아내와 그 정부에게 복수하겠다며 총포상에 간다. 점원은 갖가지 권총을 내보인다. 여러 가지 상상이 이어지다 권총 구매를 포기한다. 대신 싸구려 그물을 구입한다.
이 작품의 유머 코드는 무엇인가?
‘가정 윤리 회복, 명예 존중, 죄악 단죄’를 주장하며 아내와 정부를 죽이고 자살하려 했다. 그러다가 ‘정부만 죽이자’고 계획을 축소한 뒤 곧 ‘살인 후 자살하지 말고 체포되자. 재판에서 하고 싶은 말 다하자’로 계획을 바꾼다. 상상이 좀 더 발전되자 재판 후 사할린에 유배되는 일도 마음에 안 든다. 권총 구매를 포기한다. 거창한 계획이 용두사미가 되는 게 유머 포인트다.
체호프가 유머 이야기를 쓴 이유가 뭔가?
모스크바대학교 의대에 입학하자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했다. ‘안토샤 체혼테’, ‘내 형의 동생’, ‘쓸개 빠진 놈’과 같은 필명을 사용해서 유머 잡지에 단편 작품을 썼다. 이 시대를 “체혼테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 1년에 100편이 넘는 작품을 썼다.
돈을 벌려면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스타일은 가볍고 간결하다. 단시간에 쉽게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체호프 미래 문학의 자양분이 된다. 이때의 글쓰기 방식 때문에 그는 매우 치밀하고 간결한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된다.
체호프 미래 문학의 자양분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짧고 재미있는 글은 그에게 습작 기회가 된 셈이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가벼운 유머와 순수한 웃음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유머가 풍자가 되고 웃음에는 비극의 색채가 더해진다.
이 책에는 어떤 작품이 실려 있나?
유명 유머 잡지에 발표한 단편 중 가장 뛰어난 작품 21편을 선정했다. 러시아의 사회문제를 흥미롭게 풍자하는 소품 형식인 푀이통(feuilleton) 장르와 패러디 작품들이다.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무엇을 추천하겠는가?
술이 원수란 교훈을 주는 <만남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와 <세상에 보이지 않는 눈물>, 제정 러시아 특유의 권위주의 문제가 엿보이는 <재판>과 <카멜레온>과 <부인들>, 말장난 개그인 <말[馬]의 성(姓)>을 꼽고 싶다. <장군과 결혼식>과 <바냐에서>는 지금 봐도 공감이 일어난다.
러시아에서 술은 어떻게 원수가 되는가?
<만남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의 주인공 남자는 여인으로부터 저녁때 만나자는 메시지를 받고 시간을 때우고자 맥주를 마시다가 만취한다. 여인 앞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퇴짜 맞는다.
<재판>에서 제정 러시아의 권위주의를 어떻게 비꼬는가?
제정 러시아의 별칭이 ‘유럽의 헌병’이었다. 그때는 헌병이 민간 치안도 담당했다. 서비스 수준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재판>은 헌병의 엉망진창인 태도와 권위주의를 꼬집는다.
그들의 권위주의는 어느 정도였는가?
쿠지마 예고로프는 돈을 호주머니에 넣은 것을 깜빡 잊은 채 자신의 아들이 훔쳤다고 자백하라며 때린다. 아내가 그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발견한다. 아들에게 사과한다. 그러나 지켜보던 헌병은 “더 때려서 혼을 내 주라”는 말만 반복한다. 한심한 아버지, 헌병이다.
헌병만 있고 경찰은 없었는가?
경찰, 있었지만 한심하긴 매일반이다. <카멜레온>의 주인공 경감 오추멜로프를 보자. 어떤 사람이 떠돌이 개(?)에게 손을 물렸다며 견주로부터 보상을 받고 싶다고 호소한다. 경감은 견주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다가, 견주가 어느 장군이라는 말을 듣자 ‘자네, 개에게 물린 것 맞나? 자해한 것 아냐?’라고 추궁한다. 그러다 견주가 장군이 아니라는 말이 들리자 ‘떠돌이 개는 얼른 잡아다가 처리하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입장 번복이 몇 번이나 되풀이된다.
<부인들>은 어떤 부인들의 이야기인가?
인사 문제다. 학교 서기 자리 하나를 두고 여러 사모님들이 취직 청탁을 해 온다. 스트레스를 받은 교장은 “날 가만히 놔두시오! 제발 아무 말도 말아 주시오! 날 괴롭히지 마시오! 그리고 날 귀찮게 굴지 마시오, 제발 부탁이오!”라고 절규한다.
<말[馬]의 성(姓)>이란 어떤 이야기인가?
퇴역 육군 소장 불데예프는 치통을 앓아 고생이다. 집사가 ‘어느 주술사를 아는데 그가 치통에 용하다’고 말한다. 주술사에게 전보를 치려 하지만 집사는 주술사의 성(姓)이 말[馬]과 관련된 성이라는 것밖에 모른다. 그 성을 기억해 내려 애쓰는 과정이 웃긴다.
러시아어 말장난에 한국 독자도 웃을 수 있을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옮기면서 아홉 쪽에 걸친 짧은 이야기에 17개의 주석을 달아 최대한 설명했다. 마지막에는 러시아어를 몰라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반전 대목이 있다. 집사가 마침내 주술사의 성을 기억해 내는데 그 시점이 얄궂어서 웃지 않을 수 없다.
<장군과 결혼식>, <바냐에서>를 골라 실은 이유는 무엇인가?
공감대가 넓기 때문이다. <장군과 결혼식>은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한 해군 장성이 군함과 연관된 전문용어들을 동원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 분위기를 망치는 에피소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남자와 군대 이야기에 관한 수다’다. ‘바냐’는 공중목욕탕을 뜻한다. 목욕탕에 모인 사람들이 ‘요새 젊은것들은 영 못쓰겠다’고 떠드는 내용이다. 시대를 초월한 소재다.
체호프는 언제까지 유머를 썼는가?
1886년 작가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그리고로비치에게 편지를 받는다. ‘저급하고 급히 서둘러 쓰는 창작을 버리고, 사색하면서 뜻있는 중요한 저술에 몰두하라’는 내용이었다. ‘떡잎’을 알아본 원로 작가 덕분에 체호프는 1887년경부터 본격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의대를 졸업했지만 의사 생활도 그만둔다.
1887년 이후 그의 작가의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초원>, <등불>, <지루한 이야기>를 쓴다. 1890년엔 유형지인 사할린을 여행, 유배자들의 실태를 살펴봤다. 사회 참여에도 활발해 1891년 대흉작 때 대규모 기아 구제 운동에 나섰다. 1892년 6월 콜레라 창궐 때도 무료 진료, 학교와 병원 건립 등의 활동을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영범이다. 청주대학교 어문학부 러시아어문학전공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