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섭 동화선집
최은섭이 짓고 권채린이 해설한 ≪최은섭 동화선집≫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을 묻는다. 답하지 못한다. 될지도 모르고 안 될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린다. 바보인가? 아니다. 그가 무엇인지를 대답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아휴, 답답해. 빨리 말하란 말이야.”
웅이는 발까지 쾅쾅 굴렀어요. 그러자 초록 씨앗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내 이름을 굳이 말해야 한다면 ‘될 수 있는’이야. 그런데 안 될 수도 있어. 또 될지도 모르고….”
“뭐? 세상에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너 혹시 이름이 없는 거 아냐?”
≪최은섭 동화선집≫, <‘될’ 나무 씨앗>, 최은섭 지음, 권채린 해설, 150~151쪽
누가 누구와 무엇을 말하는 장면인가?
웅이와 씨앗의 대화다. 웅이는 꽃씨를 모아 이름을 알아 오는 숙제를 하던 중이었다. 처음 보는 씨앗 한 알이 눈에 띄어 혼잣말 삼아 이름이 뭐냐 물었다. 그런데 씨앗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씨앗은 왜 이름을 대지 못하나?
씨앗에게 이름은 허울이다. 그가 무엇이 될지는 흙에 심겼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이름’을 불러 주면 ‘꽃’이 된다던 김춘수의 주장은 허언이었나?
그가 자신의 시 <꽃>에서 말한 이름은 존재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의미’다. 하지만 이름을 안다고 해서 누군가를 아는 것일까?
존재에게 이름은 무의미한 것인가?
평론가 권채린도 말했듯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은밀한 폭력의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타자가 “주체의 일방적인 시선과 기호 속에 포획되고 재현”되기 때문이다. 또 “암암리에 타자를 일의적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내포”한다.
‘될’ 나무란 “존재의 잠재태에 대한 명명”이라는 권채린의 해석에 동의하는가?
그의 말대로 ‘될 수 있는’ 혹은 ‘될’이라는 것은 존재의 확정이 아니다. “의미화할 수 없는 의미, 의미에 저항하는 존재의 한 양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름에 대한 당신의 성찰은 어디에 닿는가?
진정으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알아 가는 데 깃든 윤리를 체득한다.
‘알아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을 다해 지켜 주는 과정,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태도다.
알면 사랑하는가?
씨앗은 “될 수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좋은 생각으로” 돌보아 달라고 한다.
‘될’ 나무의 정체는 무엇인가?
될 나무는 웅이를 태워서 그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덩굴을 뻗는다. 선생님은 이름을 묻지만 이제 웅이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웅이는 무엇을 본 것인가?
씨앗, 또는 나무의 본모습을 본다. 될 나무는 아주 오래전 자취를 감춘, 꿈과 사랑이 풍부한 사람만이 싹 틔울 수 있는 보기 드문 나무였다.
당신 작품에서 ‘어른’은 무엇인가?
아이와 대치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의 오류와 한계를 깨쳐 나간다.
그런 어른은 어디에 있는가?
<무지개다리>의 선생님이다. 담임을 맡은 반 영찬이는 지저분하고 공부도 못하는 말썽쟁이다. 선생님에게는 골칫거리고 아이들에게는 기피 대상이다. 그런 아이가 전학 가기 전날, 반 아이들의 책상에 자두를 남겨 둔다. 선생님은 “어쩌면 그렇게도 영찬이의 속마음에 눈길을 주지 않았을까?”라며 아픈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영찬이를 만난 일이 있는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독한 선생님의 표적이 된 아이가 있었다. 안 그래도 모두가 툭하면 단체 기합을 받고 손바닥 매를 맞았는데 그 아이는 덩치가 커서인지 유독 많이 당했다. 하루는 벌받느라 공부는 한 톨도 못 한 그 애가 텅 빈 교실에서 혼자 꾸역꾸역 밥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마음을 후벼 팠다.
동화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참생명력을 일깨운다.
참생명력이란 무엇인가?
존재에 대한 자각이다.
당신은 언제 존재에 대해 자각했는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무릎을 꿇고 눈을 들여다보며 말씀하셨다.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너에게 있다’고 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까지 난 전교 1등 언니와 귀한 남동생 사이에서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아이’라고 알고 있었다. 또 부끄럽고 겁도 많았다. 선생님을 통해 말과 글이 참생명력을 일깨울 수 있음을 알았다.
동화는 어떤 정신의 육신인가?
동화의 정신은 ‘희망 용기 사랑 꿈’이다. 몸이 아파서 동화를 못 쓸 때도 여전히 행복했고 새로운 것들에 눈이 반짝거렸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속에 동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꼭 쓰지 않아도 동화는 몸으로 행동으로 관계로 소통으로 실현할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최은섭이다. 동화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