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동화선집
진은진이 해설한 ≪강원희 동화선집≫
동화가 진실을 만나는 방식
우리 삶의 진실은 있는 것과 없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에 있지 않다. 언제나 그것 사이 어디엔가 있다. 동심이 그곳에 있다.
“피난 중에 만삭이던 여인을 도와주었다는데 받아 보니 검둥이였다지 뭔가, 애 어미가 아이를 낳으면서 죽게 되자 그 아이를 먼산댁이 거둬서 키우는 거라네. 먼산댁은 한 번도 그 몸에 아이를 실어 본 적이 없다지 아마.”
그 소리는 마치 빗소리나 바람 소리가 들려주는 속삭임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잿빛 느티나무>, ≪강원희 동화 선집≫, 강원희 지음, 진은진 해설, 104쪽.
어떤 장면인가?
아이가 느티나무에 올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그때 나무 밑에서 두 노인이 그의 출생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누구인가?
탄광촌에 사는 혼혈아다. 다른 아이들처럼 눈물도 하얗고 피도 붉다. 피부는 까맣다. 어머니는 그를 ‘민국’이라 부른다.
민국이가 무슨 뜻인가?
대한민국에서 딴 이름이다.
비밀을 안 아이는 어디로 가는가?
그날 밤 석탄 기차에 몸을 싣는다. 키워 준 어머니와 고향을 버리고 아버지 나라로 향한다.
아버지의 나라에 닿는가?
그곳에서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었다. 세계 평화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총구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전쟁이 거짓 평화임을 깨닫는다. 총을 버리고 카메라를 든다.
어머니는 어디 있는가?
서른 해가 지나 어머니를 찾아온다. 이미 늦었다.
서른 해 동안 어머니는 무얼하는가?
먼산댁은 각시 바위에 앉아 ‘아들 민국’을 애타게 기다린다. 세상을 떠났다.
아이는 왜 돌아오는가?
고향은 그에게 자기 자신이었다. 혼혈아와 탄광촌은 전쟁의 상처와 비극이다.
혼혈아와 탄광촌은 어떤 관계인가?
상처를 함께 나눈 하나다. 도망쳤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야기의 제목, ‘잿빛 느티나무’란 무슨 의미인가?
민국 자신과 고향의 과거다.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저 멀리 지는 놀빛에 그토록 푸르러 낯설기만 하던 느티나무가 잿빛 느티나무가 되어 옛 모습으로 그렇게 우뚝 서 있었습니다.”
더 이상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는 느티나무는 푸른빛을 되찾았지만 민국의 눈에는 어린 시절의 잿빛으로 보이는 것이다.
전쟁과 분단이 당신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뭔가?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나 자신의 역사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형제들은 이북에 가족을 남겨 둔 채 서울로 왔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끝날 무렵 태어났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소재는 비극인데 분위기는 밝은 까닭은 무엇인가?
박상재는 내 동화의 특징으로 ‘전쟁의 비극과 평화 사상, 분단의 상흔과 통일 의지’를 꼽았다. 그의 말처럼 내 동화는 전쟁과 분단을 이야기하면서도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당신 동화에서 어떤 모습인가?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나는 역사와 꿈,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꾀했다.
전통과 현대, 과거와 현재를 다룬 당신의 작품은 무엇인가?
<신문 읽어 주는 아이>다. 한옥 마을과 달동네, 한옥과 인디언 할아버지가 함께한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읽어 주는가?
100년 전쯤엔 전통 가옥이 즐비했을 한옥 마을이 달동네가 되었다. 동네에 유일하게 남은 한옥집에는 인디언 할아버지가 산다. 자전거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을 돌리는 아이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인디언 할아버지에게 신문을 읽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인디언 할아버지는 자전거만 남긴 채 떠난다.
할아버지가 왜 인디언인가?
그는 일제강점기에 멕시코로 팔려 간 조상의 행적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바호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인디언과 함께 생활했다.
한국인과 인디언을 조합하면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동질성이다. 황인종과 몽고반점, 외세에 땅을 빼앗긴 역사가 같다.
감성의 동질성을 볼 수 있는가?
‘깊고 음울’하며 ‘태곳적의 바람을 불러내’는 듯한 인디언 피리와 퉁소의 소리를 들어보라. 두 민족의 감성이 만나는 지점이다.
진은진은 당신 동화에서‘현실과 환상의 공존’을 본다. 그런가?
그럴듯하다. 동화만이 우리 삶의 진짜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어째서 동화만이 진실을 그릴 수 있나?
동심은 허구와 실재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허구와 실재 사이에 있다.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
수색초등학교 때 동화작가 조대현 선생님을 만났다. 집이 있던 모래내에서 수색까지는 5리나 되었지만 그 길은 나에게 끝없이 펼쳐지는 동화책이었다.
화가 이중섭과 당신의 특별한 인연은 무엇인가?
그의 그림을 보고 그리움의 동화에 눈떴다. 훗날 일본에서 그의 미망인을 만났는데 내가 쓴 동화로 한글을 공부하고 계셨다. 이 인연으로 ≪천재 화가 이중섭과 아이들≫을 지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강원희다. 동화와 동시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