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연의 유희/논쟁
이경의가 옮긴 마리보(Marivaux)의 ≪사랑과 우연의 유희/논쟁(Le Jeu de l’amour et du hasard/La Dispute)≫
사랑은 언제나 부족하다
가까우면 타 버리고 멀면 식는다. 식은 사랑은 얼음보다 냉정하고 타 버린 재는 숨결에도 사라진다. 마리보는 사랑의 불충실함을 목격한다. 나도 남도 아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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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트: 아니, 내가 무슨 말을 들었지? 어르신께서 리제트의 아버님이시라고요?
실비아: 그래요, 도랑트. 우린 상대방을 알아보겠다는 같은 생각을 했던 거예요. 어쨌든 이제 당신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요. 이젠 당신이 제 감정을 판단하실 차례예요. 제가 얼마나 섬세하게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는지 심판하세요.
≪사랑과 우연의 유희/논쟁≫, <사랑과 우연의 유희>, 마리보 지음, 이경의 옮김, 28∼29쪽
뭔가 비정상적인 내용의 대화 아닌가?
실비아와 도랑트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귀족 신분인 두 사람은 그동안 하인으로 위장해 상대방을 탐색했다.
신분을 위장해 탐색에 들어간 사연이 뭔가?
귀족 오르공은 딸 실비아가 도랑트와 혼인하길 바란다. 그러나 실비아의 생각은 다르다.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이라 해도, 또 그것이 숙명이라고 해도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실비아는 숙명을 뒤집을 수 있는가?
하녀 리제트로 가장해 도랑트의 사람됨을 확인하려 한다.
도랑트의 사람됨이 확인되는가?
그런데 도랑트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네 사람의 변장극인가?
실비아와 하녀 리제트, 도랑트와 하인 아를르캥이 역할을 바꿔 등장한다. 마리보는 인물들이 본래 정체를 감추고 상대방의 품격과 심리를 알아보게 하려는 취지로 ‘변장 기법’을 사용했다.
최종 승자는 누구인가?
실비아다. 그녀는 도랑트의 정체를 알고도 자기 실체를 끝까지 감춘다. 오빠인 마리오를 이용해 도랑트의 질투를 유발하기도 한다. 결국 도랑트의 청혼을 받아 낸다.
연극은 성공했는가?
마리보의 대표작이다. 그가 쓴 희극 30여 편 가운데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히트했는가?
1730년 이탈리아 극단이 초연한 뒤 프랑스 국립극장에서만 1400회 넘게 공연했다. 작가의 극작법과 주제를 압축하며 ‘마리보다주’의 정수를 보여 준다.
‘마리보다주(marivaudage)’란 말이 있는가?
마리보식 극작법을 말한다. 남녀가 서로를 유혹하기 위해 나누는 우아하고 기교적인 대사와 사랑을 유희처럼 즐기려는 연인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게 특징이다. 처음에는 마리보를 조롱하려는 취지로 사용한 용어였으나 작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면서 마리보의 위상과 함께 그 의미가 새삼 인정되고 있다.
프랑스 고전 희극에서 이 작품의 위치는 어디인가?
혁신적 전환점을 이룬다. 전통적인 인물 설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인물에게 개성을 불어넣어 극에 혁신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뭐가 그리 혁신적이란 말인가?
예를 들어 실비아는 17세기 희극에서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 주던 젊은 규수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사회적 관습과 거리를 두고 자기 미래를 주도적으로 결정하려는 면모를 보여 준다.
당신이 이 책에 함께 엮은 <논쟁>은 어떤 희곡인가?
1744년 10월 19일, 파리 국립극단에서 초연한 뒤로 200년 가까이 공연하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다. 1938년 ‘코메디프랑세즈’ 무대에 다시 올려진 뒤로 1967년에 24회 연속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논쟁’이란 어떤 의미인가?
작품의 소재를 압축한 제목이다. 남녀가 사랑하는 과정에서 어느 쪽이 먼저 변심하는가를 놓고 궁정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논쟁이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하자 답답해진 군주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실험을 감행한다.
어떤 실험이 남녀의 변심을 확인할 수 있는가?
어린아이 네 명을 문명과 사회로부터 격리해 키운 뒤 이들의 행태를 통해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남과 여, 누가 먼저 변심하는가?
네 젊은이가 자라 성년의 문턱에 들어선다. 첫 만남에서 에글레와 아조르, 아딘과 메랭이 연인으로 맺어진다.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이성을 만나면서 기존의 관계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변심과 배반 단계로 나아간다.
마리보의 단골 주제인 ‘사랑의 불충실함’을 정면으로 다룬 것인가?
자신의 주제를 여실히 증명했다. 에글레를 비롯한 네 젊은이들은 새로운 이성이 출현하면 먼저 맺은 인연에서 벗어나려는 심리를 표출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미지의 연인에 대한 욕망을 분출하면서 현재 사랑을 과거로 만드는 것이다.
변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은 없나?
대단원에 등장하는 두 젊은이 멜리스와 디나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랑을 보여 준다.
마리보는 누구인가?
보마르셰와 함께 18세기 프랑스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다. 연애 감정의 세밀한 묘사에서는 몰리에르를 능가할 정도다.
그에게서 문학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청년기에 접어든 1710년에 파리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하지만 자기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문학에 입문하기로 결심한다. 24세에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단막극을 공연했지만, 정식 데뷔는 사교계 취향을 반영한 장편 연애소설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극작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되나?
1720년에 <한니발의 죽음>, <사랑과 진실>, <사랑으로 세련되어진 아를르캥> 세 작품을 발표한다. 1720년대에 극작품 15편을 내놓으며 극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그 중 11편을 이탈리아 극단에서 공연했다.
초년의 불꽃이 말년까지 계속되었을까?
그는 부르주아지 출신으로 막대한 지참금을 가져온 콜롱브 불로뉴와 결혼했다. 하지만 곧 파산하고, 이어서 부인이 결혼 7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네 살배기 딸을 혼자 키워야 할 처지에 놓인 마리보는 생계를 위해 글을 써야 했다. 1742년 프랑스 한림원 회원으로 선출되지만 이후 뚜렷한 작품 활동 없이 지내다 176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때 그는 동시대 문단에서 거의 잊힌 존재였다.
잊혀진 18세기 작가에게 20세기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연극계와 평론계 인사들이 마리보 연극을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18세기의 몰리에르로 추앙받던 보마르셰를 제치고 마리보는 이제 몰리에르와 비교되는 작가로 부상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경의다. 경북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