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오브 마인드: 매개된 행위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신춘 학습이론 특집 1. 그런 교육학을 버릴 때가 되었다
제임스 V. 워치(James V. Wertsch)가 쓰고 박동섭이 옮긴 ≪보이스 오브 마인드 : 매개된 행위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Voices of the Mind : Sociocultural Approach to Mediated Action)≫
비고츠키에 대한 거의 완전한 오해와 진실
워치는 바흐친의 대화론을 사용해 비고츠키의 전망을 갈고 닦는다. 인간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태도, 마음을 불완전한 지향 행위로 보는 자세는 이제 과학의 지위를 얻는다.
특정한 말의 장르와 특권화 유형을 인식하는 능력은 사회문화적 상황과 심리적 과정을 이해하는 새로운 분석 도구를 제공할 것이다.
-‘6장 사회문화적 상황, 사회적 언어, 매개된 행위’, <<보이스 오브 마인드>>, 243쪽.
이 책, <<보이스 오브 마인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의 ‘마인드(정신 활동)’가 어떻게 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구성되는지를 밝힌다. L. S. 비고츠키를 원류로 하는 사회문화적 접근 방식을 축으로 하고 바흐친의 ‘목소리’와 ‘대화’, ‘발화’ 개념을 핵심 보조선으로 채택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무엇이 새로운 관점인가?
인간 이해에 새로운 물음을 던지고 학제적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교육이나 양육 실천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사유한다.
무엇이 새로운가?
기존의 주류 심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분석 단위’를 제안한다.
심리학 연구에서 새로운 분석단위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현대 심리학은 끝없이 세부 분과로 나뉘고 분절되었다. 인간은 점점 더 원자화, 모듈화한다. 대안은 새로운 분석단위다. 이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워치는 어떻게 학제 연구를 실천하는가?
심리학으로 학인의 삶을 시작했지만, 그의 사상적 스승인 비고츠키가 그랬듯이 철학, 기호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등에서 폭넓게 인간을 이해하는 식견을 얻었다. 1987년까지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의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1988년부터 1995년까지 클라크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현재는 워싱턴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핵심 질문은 뭔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것이 그의 핵심 질문이다.
그는 대답도 알고 있는가?
이 책은 난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는다. 질문에 쉴 새 없이 밑줄을 긋는다.
밑줄을 그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을 연구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풍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아닌가? 새로운 것이 뭔가?
비고츠키 심리학과 바흐친의 철학은 통상적 사안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개인 내에서 뭔가 일어나면 그것이 외부로 나타난다’는 통념에 대해 철저한 회의(懷疑)를 주장한다.
내부가 외부로 나타난다는 주장이 틀린 것인가?
관객이 없으면 ‘마인드’나 ‘목소리‘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감정은 개인 내에서 일어나는 것 혹은 자신의 내면에 근거를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실은 그렇지 않다. 애당초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호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학습의 결과라는 주장인가?
최신 뇌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 모방을 통해 감정을 학습한다. 미러 뉴런의 움직임을 통한 학습이다.
미러 뉴런이 뭔가?
타인이 어떤 동작을 할 때 보고 있는 사람의 뇌 속에는 그것과 똑같은 동작을 지시하는 뉴런이 작동한다. 미러 뉴런은 행위할 때에도, 지각할 때에도 움직인다. 타인의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 안에 가상적 신체 운동이 일어나고 타인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 상태가 되어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타인의 신체 표현을 모방해 그것이 동반하는 정서가 내면화된 결과로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다.
순수한 감정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인가?
그런 것은 없다. 감정은 타인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형이 없는, 즉 사회문화적 관계가 없는 ‘순수한 감정’ 혹은 ‘개인의 내부가 원류인 감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없을 때조차 ‘이 사람이 화가 났구나’라고 알 수 있는 감정 표현을 외형화한다. 아니, 외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 표현이 빠진 채 윤곽이 확실한 감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관객이 없으면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 사회적 기호다.
‘마인드’도 그렇게 만든 결과인가?
그렇다. 통념은 ‘마음’을, 피부를 경계로 개인의 내부에 ‘실체’처럼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금고’ 혹은 ‘상자’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일상 세계에서도 여전하다. 비고츠키와 바흐친 그리고 워치는 이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음이 개인의 고유한 실체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금고나 상자처럼 자기 완결적 혹은 고정적 실체가 아니다. 열린, 불완전한, 무언가를 항상 지향하는 행위(action)의 결과다. 사회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성립 가능한 과정이다. 저자의 관심은 마음이 도구나 타인,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발생해 변화하는지에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mind’를 ‘마음’이나 ‘정신’으로 옮기지 않은 것이다.
‘목소리’는 무슨 뜻인가?
바흐친의 개념이다. 목소리(voice)는 ‘발화’의 전제로, 주체의 의지, 강세와 억양을 반영하고 주체가 발화하는 상대 혹은 대상과 장면의 목소리(의지, 강세와 억양)를 반영한다. 발화는 늘 복수의 목소리, ‘다성(polypony)’일 수밖에 없다.
발화가 늘 복수의 목소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발화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목소리, 곧 화자와 청자, 그리고 상황이 포함된다. 바흐친은 이를 ‘복화성(ventriloquis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복화성은 하나의 목소리 안에 타자가 살고 있고 어떤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를 매개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시각이다.
내 목소리 안에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살 수 있는가?
말은 의사소통의 연쇄 속에서 획득된다. 어떤 발화, 곧 목소리의 지향, 강세와 억양은 결코 말하는 주체에 의해서 임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타자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 즉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하기(복화하기) 시작해 그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구성해 간다. 우리가 말할 때 그 발화에는 이미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회적 언어’ 그리고 ‘말의 장르’라는 타자 목소리를 포함한다. 목소리는 철저히 사회적이다.
발화 과정은 정신기능 과정을 반영하는가?
그렇다. 그래서 정신기능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도구에 매개된 행위’, ‘언어에 매개된 행위’를 핵심 개념으로 상정한다.
‘도구에 매개된 행위’를 사례로 설명할 수 있는가?
343×822는 무엇인가? ‘281946’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지 않은 계산이다. 그런데 문제를 푼 것이 정말로 개체로 고립된 당신 개인일까?
내가 문제를 풀었는데 내가 풀었냐고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계산 절차를 약간 바꿔 보자. 343×822은 흔히 하듯 세로 셈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그냥 가로 셈으로 풀어 봐라. 곤란한가? 이제 다시 묻는다. 과연 이 문제를 행위자 혼자서 풀었을까?
내가 배운 계산법으로 풀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
인간의 행위는 도구와 뗄 수 없는 관련 속에서 이뤄진다. 인식의 시야를 이렇게 넓혀야 한다. 외계와 도구, 그것과 일체되어 행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실제다. 이것이 바로 도구에 매개된 행위라는 것의 의미다.
인간 정신기능의 발달에 도구는 필수 요건인가?
그렇다. 쟁기, 호미와 같은 원시적인 기술적 도구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스마트폰과 같은 현대의 기술적 도구, 언어, 숫자, 그래프, 수식, 그리고 공식과 같은 심리적 도구까지 포함한다.
이 책은 주로 언어를 다룬다. 소쉬르의 ‘랑그’를 말하나?
아니다. 이 책에서 ‘언어’는 비고츠키식으로 말하면 ‘언어적 행위(speech act)’고, 바흐친식으로 말하면 ‘발화’다.
랑그와 언어적 행위와 발화는 뭐가 다른가?
바흐친은 모든 의사소통 행위를 분석할 때 ‘발화’를 최소 분석단위로 삼고자 했다. 소쉬르가 설정한 이분법을 철저히 타파하려는 시도다. 소쉬르는 랑그는 규범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고 파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다룬다. 랑그야말로 언어의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보았다.
바흐친의 발화는 무엇인가?
개인적 활동인 동시에 사회적, 제도적, 역사적 활동이다. 발화는 주체와 객체를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발화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micro-context)에 참여한 사람의 지위, 역할, 문화적 인공물, 상징 등이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활동을 방향 지으면서 동시에 제약하는 더 큰 상황(macro-context)의 규범, 가치 등이 침전되어 있다.
주장의 초점이 뭔가?
바흐친은 발화 혹은 말(speech)에 의한 의사소통이라는 현실의 단위에 분석 초점을 두었다. 소쉬르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랑그가 아니라 역사적, 제도적, 문화적, 개인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성립하는, 상황 속의 언어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이 책에서 비고츠키 이론은 어떻게 수용되고 발전되는가?
비고츠키 아이디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바흐친의 대화론을 도입해 언어적 기호 매개의 ‘정치화(精緻化)’를 시도했다. ‘목소리’는 이러한 확장된 언어 매개를 가리키는 것이고, 구체적이고 복잡한 제도와 얽혀 발생하는 우리 ‘마음의 작동’ 양상도 가리킨다. 이러한 확장을 위해 바흐친의 발화, 목소리, 사회적 언어, 혹은 말의 장르, 대화성 원리와 같은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비고츠키에 대한 한국 지식 사회의 통념과 당신의 주장은 다르다. 이유가 뭔가?
한국 교육계에서 비고츠키 이론은 사회적 구성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오해다. 엄밀히 따지면 사회적 구성주의는 비고츠키의 지적 전통과는 다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면, 사회적 구성주의는 수업 기법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하나의 틀 혹은 인식론, 인간 철학이다. 따라서 ‘사회적 구성주의를 활용한’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심리학의 위기라는 그의 주장과 관련된 관점인가?
비고츠키가 왜 1920년대에 득세했던 행동주의 심리학, 게스탈트 심리학, 그리고 피아제 심리학 등을 보고 ‘심리학의 위기’라고 경고했겠는가? 비고츠키에 접근할 때 지금까지 관행처럼 이루어진 교육학적 접근은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오류다. 비고츠키 이론을 편협한 방법론 수준에서 이용해선 안 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비고츠키와의 올바른 만남의 길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도구란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인간과 사회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심리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인문학적 물음을 비고츠키와 공유하는 것이 비고츠키를 제대로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책이 이런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역자 주가 130개다. 어려운 책인가?
내용이 무척 까다로웠다. 독자들에게 좀 더 친절하고 알기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을 여는 열쇠는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이것이 비고츠키와 바흐친의 아이디어 그리고 이 책을 이해하는 문을 여는 자세다.
당신은 누구인가?
박동섭이다. 신라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