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정한모 시선
송영호가 엮은 ≪초판본 정한모 시선≫
아기 또는 나비의 여행
어리고 연약한 것에게 여행은 모험이다. 태양과 달, 별빛과 바람에 기대보지만 미로에 부딪쳐 까무라치기 일쑤다. 내일 다시 날개를 펴는 이유는 가볍고 가볍고 가볍기 때문이다.
나비의 旅行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睡眠의 江을 건너
빛 뿌리는 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나르다가
깜깜한 絶壁
헤어날 수 없는 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阿鼻叫喚하는 火藥 냄새 소용돌이
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恐怖의 江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恐怖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초판본 정한모 시선≫, 송영호 엮음, 93∼94쪽, <나비의 旅行> 전문
누구의 여행인가, 나비 또는 아가?
‘아가’를 중심으로 시상이 전개되지만, 아가는 간혹 나비의 이미지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나비의 이미지는?
“하늘하늘”, “나르다가”, “젖은 나래” 같은 표현이 그 예다. 제목 또한 ‘나비의 여행’이다.
둘은 어떤 관계인가?
정한모의 시에서 둘은 공통적으로 ‘절대 순수’, 혹은 ‘연약한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런 점은 불길하고 음험한 대상, 예를 들어 ‘깜깜한 절벽’이나 ‘사나운 골짜기’ 같은 것들과 만나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가의 행동반경은 원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데 반해 나비는 그보다 훨씬 크고 넓은 반경으로 활동한다.
두 개의 주체를 운영하는 이유는 뭔가?
‘아가’라는 상징적 기표를 통해 절대 순수라는 이미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나비’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그가 일정한 장소에만 머무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정한모 시에서 ‘아가’는 무엇인가?
어느 역사 순간에도 자유롭게 출현하는 능동적 행위 주체다. 순수의 추상체 혹은 관념 상징물을 넘어서 순수와 자유를 지향하는 시인의 실천 의식이 투영된 존재다. 정한모 시 세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아가’는 언제부터 나타나는가?
세 번째 시집 곳곳에서 등장한다. 폐허 의식과 어둠으로 점철되어 있던 때에 이미 ‘아가’의 존재를 잉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이전 시 세계는 어땠나?
첫 시집 ≪카오스의 蛇足≫은 해방 공간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사의 어둡고 우울한 내면을 반영했다.
희망은 언제부터 나타나는가?
두 번째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에서다. <바다의 소묘>에서 ‘한밤내 돌다 돌다 보면 아침이 오는’ 법이라고 노래했다. 특히 <가을에>서는 ‘밤’과 ‘겨울’이라는 어둡고 차가운 이미지 대신 ‘맑은 햇빛’, ‘미소’, ‘믿음’ 같은 밝고 경쾌한 시어를 줄기차게 사용한다.
아침이 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전쟁의 불합리성과 1960∼1970년대 한국 근대사가 야기한 인간성 상실의 모순을 비판하면서도 생명력이 충만한 세계를 간직한 시가 나타났다.
희망 이후 그의 시는 어떤 모습인가?
한국 현대사의 우울한 풍경을 깊이 응시하면서 그 속에서 사라져 가는 순수성과 인간화의 미덕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정한모가 시인의 꿈을 키운 것은 언제인가?
오사카에 있는 로카상업학교에 입학하고부터다. 이때 그는 저명한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시마지키 도손 등의 시를 읽으며 시인의 꿈을 키웠다.
유년 시절은 어땠나?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주로 객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조모, 모친과 함께 외롭고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떻게 등단했나?
1945년 ‘백맥’과 1946년 ‘시탑’, 1947년 ‘주막’ 등 동인 활동을 통해 데뷔했다.
동인들은 어디서 만났나?
1947년, 25세라는 비교적 많은 나이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이때 전광용, 남상규, 정한숙, 정영경 등을 만나 ‘주막’을 결성했다. 한국전쟁 중에 충청도로 피난했는데, 이때 지인 소개로 공주대에 출강하면서 제자와 문인들을 만났다.
이후의 삶은 어땠나?
1966년부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 교수로 부임해 22년간 재직했다. 시집 여러 권과 저술을 펴냈다. 1988년에는 문공부 장관으로 취임해 납·월북 문인의 해금을 주도하는 등 문화 예술 행정가로서 업적을 남겼다. 1991년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송영호다. 만해학술원 연구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