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시선 초판본
秋日抒情 2 : 가을의 계단을 내리면
가을의 계단을 내리면
긴 생각에 잠긴 시인의 애인처럼
서울의 나무들은 고요해지고
창을 열면 그늘에 살찐 서울의 여인들
임자 없는 가을의 거미줄처럼 걸린
가슴에
가을이 샌다
가을은 떠나는 계절
그리워서 잠시 머무는 계절
지금 평생 집을 가지지 않은 채 떠나는 벗이 있읍니다
지금 밤을 새워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는 벗이 있읍니다
지금 낙엽이 바람에 날리는 길에 여기저기로
구르는 벗이 있읍니다
…계단을 내리면
무수히 흐트러진 사람들의 발자취
임자 없는 가을의 거미줄처럼 뚫린
내 가슴에
먼 시인의 애인처럼 가을이 걸린다
– ≪초판본 조병화 시선≫, 조병화 지음, 김종회 엮음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여든세 해 세상에 머무는 동안 54권의 시집을 남겼다. 시는 심각하거나 근엄하지 않았다. 도시인의 애상을 잔잔하고 진솔하게 노래했다. 떠나기 전 잠시 머무는 이 계절, 계단을 내리면 긴 생각에 잠긴 시인의 애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