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 서간문
세밑 편지 2
천 년 전의 자기 추천서
盡言.
고대 중국의 문학이론서 ≪문심조룡≫은
편지글의 본질이 “할 말을 다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다하느냐, 이겠죠.
1200년 전 당나라 문인 한유가
과거에 응시하면서 작성한 자천 편지입니다.
요즘 세태와 사뭇 다르죠?
아무개 달 아무개 날에 한유가 두 번 절합니다.
넓은 바닷가와 큰 강 언덕에 괴물이 살고 있는데, 보통 비늘과 평범한 딱지를 가진 여느 물고기나 갑각류와 같은 수생동물이 필적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이 물을 만나면 변화가 신통해 자유자재로 비바람을 불러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물을 만나지 못하면 단지 몇 자 안 되는 좁은 범위 내에 갇힐 뿐입니다. 높은 산과 큰 언덕, 먼 길과 험난한 요새도 그것을 가로막아 격리하지 못하지만, 물이 마른 곳에서 곤궁을 당할 때에는 스스로 물이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하고 십중팔구 수달의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만약 유력자가 그것의 곤궁함을 가련하게 여겨 물속으로 옮겨준다면, 그것은 손을 한 번 들고 발을 한 걸음 옮기는 정도의 수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괴물은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데 자부심을 품고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말합니다.
“모랫바닥에서 문드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차라리 달게 받을 것이다. 개처럼 고개를 숙이고 귀를 축 늘어뜨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동정을 구하는 것과 같은 짓은 결코 나의 뜻이 아니다.”
이 때문에 유력자가 그것을 만나더라도 자주 보아 눈에 익어서 못 본 것같이 합니다. 그것이 죽을지 살지는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또 유력자가 그것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이 잠시 고개를 들고 한 차례 울부짖는다면, 그 사람이 그것의 곤궁함을 가련하게 여겨 손을 한 번 들고 발을 한 걸음 옮기는 수고를 잊고서 그것을 맑은 물속으로 옮겨 주지 않는다고 어찌 알겠습니까?
그 사람이 그것을 가련하게 여기는 것도 운명이고, 그 사람이 그것을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운명이며, 이 모든 것이 운명의 소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울부짖는 것도 운명입니다. 저는 지금 실로 이 괴물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의 거칠고 어리석은 무례함을 잊고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저를 불쌍히 여기고 살펴 주시옵소서!
– <관리 임용 시험을 치를 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應科目時與人書)> 전문, ≪한유 서간문≫
편지글은 ‘마음의 소리를 교류하는 도구’이고, 그 본질은 ‘할 말을 다하는 데’ 있다. 당나라의 사상가요 정치가이자 명문장가인 한유(韓愈, 768∼824)는 그 본질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도(道)와 문(文)의 합일을 주장한 그의 편지글을 모두 옮겼다.
≪한유 서간문≫, 한유 지음, 이종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