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위군(희곡)
강수경이 옮긴 미하일 불가코프(Михаил А. Булгаков)의 희곡 ≪백위군(Белая гвардия)≫
권력과 전쟁과 가족
1917년부터 1920년까지 14번 정권이 바뀐다. 권력은 충돌하고 사람은 죽어 나간다. 혁명과 전쟁, 러시아 인텔리의 운명을 목격한 작가의 선택은 가족이었다.
알렉세이: 조용히! 자,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제군들은 여전히 제군들 앞에 놓인 무엇을… 누구를… 지키려는 과업을 수행할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 난 여러분들의 전투를 지휘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광대놀음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대놀음 때문에 자신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마를 닦는다.) 내 아들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상비군 장교로서 독일군과의 모든 전쟁을 치렀다. 이에 대해서는 스투진스키 장군과 미실라옙스키 장군이 증인이다. 나의 양심과 책임감으로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제군들에게 경고하건대, 제군들을 사랑하기에 집으로 돌려보낸다.
≪백위군≫,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강수경 옮김, 141쪽
알렉세이는 누구인가?
게트만의 포병 부대 대령이다.
게트만이 누구인가?
우크라이나 민족의 수장이다. 백위군, 곧 반혁명군에 가담했다.
왜 전투를 “광대놀음”이라 한 건가?
게트만이 독일 정부의 조종을 받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고, 국가의 몰락과 고귀한 인간 정신의 파멸이 닥쳐올 것이다.
독일의 조종을 받게 된 이유는 뭔가?
1764년 예카테리나 2세는 유명무실해진 게트만의 직위를 없앴다. 1918년 4월 독일 정부는 게트만을 직접 선출해 부활시켰다. 게트만은 독일군의 지시와 지원을 받아 행동했다.
게트만은 지금 어디에 있나?
독일군 제복으로 갈아입고 독일로 몰래 도망쳤다. 고위급 인사 다수도 독일로 달아났다.
그래서 게트만군은 해산하나?
젊은 생도와 장교 200여 명은 알렉세이의 명령에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알렉세이와 동생 니콜카만 김나지움에 남아 페틀류라군을 기다린다.
페틀류라는 누구인가?
농민과 하층 계급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혁명군 수장이다. 훌륭한 무기와 20만 명의 군대를 가졌다.
알렉세이와 니콜카에게 닥칠 운명은 무엇인가?
알렉세이는 죽임을 당한다. 니콜카는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페틀류라군의 승리인가?
그렇다. 하지만 영원한 승리는 아니었다.
다음 승리는 누구의 것인가?
볼셰비키다. 1919년 크리스마스 전야 볼셰비키가 키예프에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페틀류라군이 떠나기 시작했다.
1919년 크리스마스 전야 키예프의 풍경은 어땠나?
거리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와 상반된 장면이 알렉세이의 집에서 펼쳐진다.
알렉세이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밝혀져 있다. 스투진스키, 미실라옙스키, 집주인 바실리사, 알렉세이의 조카 라리오시크는 카드놀이를 한다. 술잔이 오가고 니콜카의 노랫소리와 농담이 집 안을 채운다.
내부와 외부의 괴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알렉세이의 집은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장소다. 주인공들은 볼셰비키가 세우는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가족의 전통과 가치, 문화가 녹아 있는 집을 변함없이 보존해 나가는 세상을 꿈꾼다.
<백위군>의 집필 동기는 무엇인가?
1917년부터 1920년까지 키예프에서 열네 번의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 불가코프는 의사라는 이유로 전쟁터의 이곳저곳으로 동원되었다. 뜻하지 않게 마주한 혁명과 전쟁, 러시아 인텔리들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인간 실존의 의미를 이야기하려 했다.
이 작품에 대해 당시 러시아의 반응은 무엇인가?
1926년 10월 5일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고 1941년까지 987회나 무대에 올랐다. 스탈린은 열다섯 번이나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백위군>을 수정한 <투르빈가의 나날들>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백위군>이라는 제목으로 상연하지 못했다. 검열 때문이다. 불가코프는 혁명과 전쟁에 회의적이었다. 혁명의 반대편에서 인간의 가치를 지키려 한 주인공들의 신념과 갈등을 그린 작품은 소비에트 체제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다.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와 문학부장 마르코프는 희곡의 제목과 세부 내용을 대폭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불가코프는 원치 않았지만 극장의 힘에 밀려 그들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투르빈가의 나날들>이 공연되었다.
지금 모스크바의 상황은 어떤가?
모스크바 대표 극장의 연출가들은 작가의 본래 의도를 되살리려 노력한다. 제목도 불가코프가 원했던 <백위군>으로 내걸고, 소설에서 희곡으로 각색되면서 생략된 부분을 연극 장면에 포함시킨다.
이 책의 번역 판본은 무엇인가?
두 번째 판본이다. 검열을 의식하지 않은 불가코프의 의도가 그나마 정확하게 표현되고 극작가로서 빛나는 재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가코프는 어떻게 살다 갔나?
1891년 5월 15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키예프대학 의학부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의무병으로 발령받아 전쟁을 체험했다. 전쟁과 혁명이 끝난 뒤 작가로서 사명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작품을 썼다. 1921년 모스크바에 정착한 뒤 번역, 볼쇼이극장의 리브레토 작업, 단역배우로 출연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1930년 “조국에서는 존재의 수단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해 망명을 요청한다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고, 이듬해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조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상연 금지와 출판 금지 명령으로 고혈압 신장경화증이 악화되어 1940년 3월 10일 숨을 거뒀다.
어떤 작품을 썼는가?
≪백위군≫, ≪비운의 달걀≫, <조이카의 아파트> 등 소비에트 권력의 유토피아적 허상을 반어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을 썼다. 여러 작품을 다른 장르로 개작하는 훌륭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몰리에르의 희곡 <위선자들의 밀교>를 소설로, 고골의 ≪죽은 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희곡으로, 고골의 ≪죽은 혼≫과 ≪검찰관≫을 영화 시나리오로 개작했다. 죽기 3주 전까지 12년간 써 왔던 역작 ≪거장과 마르가리타≫ 창작을 계속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강수경이다. 타이완 국립 가오슝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