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전노
지식을만드는지식과 겨울여행 5. 13세기 중국 대륙의 추위
식은 심장은 얼음보다 차다
겨울 여행 다섯 번째 안내자는 원나라 사람 정정옥이다. 오늘 우리를 눈발이 점점 거세지는 대륙의 늦겨울로 데려간다. 농업에 의존하던 봄과 여름은 가 버리고 동서양을 연결한 원나라에는 공업과 상업이 융성하다. 사람들은 돈을 알기 시작하고 맛을 즐기더니 이내 부모도 버리고 형제도 배반하며 돈 세는 데만 열중한다. 돈이 있는 곳은 따뜻하고 없는 곳은 차가운데 길거리로 내몰린 인간들은 하나둘 얼어 죽기 시작한다. 눈이 많이 왔다고도 하고 날이 너무 추웠다고도 하지만 직접 사인은 무전에 의한 노상 방치로 말미암은 저체온증이다. 무엇이 인간을 죽게 하는가? 식은 심장은 얼음보다 차다.
주영조: 소생은 주영조입니다. 피붙이는 세 식구로 아내는 장씨고 아이는 장수라고 하지요. 과거 시험 보러 갔다가 운이 안 좋아서 공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것까지는 다 좋은데 집에 돌아왔더니 매사가 뜻대로 되는 일이 없군요. 거기다가 우리 조부께서 물려주신 재산도 담장 밑에 묻어 놓았는데 그걸 몽땅 누가 훔쳐 가 버렸지 뭡니까! 이때부터 입고 먹는 게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세 식구가 낙양의 친척을 찾아가서 도움을 기대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불운이 닥쳐서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바야흐로 늦겨울 날씨를 만나고 보니 연일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길을 가기가 정말 힘들군요!
장씨: 서방님, 이렇게 바람이 세고 눈발이 거세니 우리 좀 서두르도록 해요!
주장수: 아빠, 얼어 죽겠어요!
주영조: (노래한다.)
정말 길은 걷기조차 힘든데,
우리 집은 어디에 있는지?
눈이 내려 온 천지와 산까지 머리가 하얗게 세었구나!
이렇게 얼어붙은 구름이 만 리나 끝없이 펼쳐졌는데,
유독 우리 세 식구만 고향을 떠나 타지를 헤매는구나!
(말한다.) 부인, 펑펑 쏟아지는 눈 좀 보구려! (노래한다.)
<곤수구(滾繡球)>
그 누가 아름다운 옥구슬 갈아 체질해서 뿌리는고?
누가 얼음꽃을 잘라 눈앞에서 흩날리게 하는고?
흡사 전각이며 누대를 분으로 화장이라도 해 놓은 것 같구나!
(말한다.) 이렇게 눈이 쏟아졌으니, (노래한다.)
한퇴지인들 남관(藍關) 어귀에서 추위를 어찌 감당이나 했겠나?
맹호연이라도 나귀 등에서 미끄러져 떨어졌을 테지!
(말한다.) 이렇게 눈이 쏟아지니, (노래한다.)
섬계(剡溪)에서 되돌아간 자유라도 대씨(戴氏)를 찾아들지 않을 수 없겠네.
우리 세 식구 다 얼어서 흙먼지 속에 쓰러지고 말겠구나!
(추위에 몸서리를 친다.) 으흐흐! (노래한다.)
분명히 일가족이 오만 가지 고초를 다 겪건마는,
부잣집 열 곳을 찾아가면 아홉은 내다보지도 않으니,
참으로 견디기 어렵구나!
장씨: 서방님, 이렇게 바람도 거세고 눈도 엄청나니 잠시 저기로 가서 피하는 게 어떻겠어요?
주영조: 부인, 우리 저쪽 술집으로 가서 눈을 피하도록 합시다. (…) (지배인과 대면하더니) 주인장, 안녕하십니까!
지배인: 안으로 들어오셔서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 선비님께서는 어디 분이십니까?
주영조: 주인장,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술을 다 사 마시겠소이까? 소생은 가난뱅이 선비인데 세 식구가 친척을 찾아갔다가 오는 길에 난데없이 하루 종일 내리는 큰 눈을 만났소이다마는 몸에는 걸친 옷도 없고 배에는 든 음식도 없던 차에 바로 여기까지 눈을 피하러 왔구려. 주인장, 어떻게 좀 딱하게 봐 주시구려!
지배인: 누가 집을 지고 다닌답니까! 잠시 들어와서 눈을 좀 피했다 가시지요.
(주영조가 함께 들어간다.)
주영조: 부인, 눈발이 점점 거세지는구려! (노래한다.)
<당수재(倘秀才)>
굶주린 나는 배가 고파 정신이 다 오락가락하고,
얼어붙은 나는 몸이 시려 핏기마저 다 가셨네.
이 눈이,
하필이면 나 같은 가난뱅이한테만 마구 퍼붓는구나!
(말한다.) 부인, (노래한다.)
눈 많이 쏟아져 발등까지 뒤덮고,
바람도 거세져 가슴속까지 파고들기에,
내 서둘러 아이 손을 잡아끄노라.
***
한퇴지(韓退之):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린 죄로 귀양을 가다가 섬서성 남관에 이르렀을 때 “눈이 남관에 휘몰아치니 말이 나아가지 않누나”라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맹호연(孟浩然): 당나라 시인. 눈보라 속에 나귀를 타고 시의 소재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자유(子猷): 진(晉)나라 사람 왕휘지(王徽之)의 자. 자유는 어느 날 밤 내리던 눈이 그친 후 아름다운 설경을 보다가 섬계에 사는 친한 벗 대안도(戴安道) 생각이 나자 그 길로 배를 타고 대안도를 방문하러 나섰다. 그런데 자유는 배가 대안도의 집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귀가해 버렸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애초에 흥이 나서 간 것인데 흥이 사그라들었기에 돌아온 것뿐, 왜 꼭 대안도를 만나야 하는가?” 하고 반문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눈이 하도 내리고 추워서 자유라도 귀가할 생각을 못하고 바로 대안도의 집까지 갔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쓰고 있다.
<<간전노>>, 정정옥 지음, 문성재 옮김, 62~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