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김기림 시선
한국 시, 모더니즘 신간 <<초판본 김기림 시선>>
김기림이 이상에게
1930년대의 세계는 근대 문명에 대한 감수성과 역사 발전에 대한 희망으로 명랑했다. 청년의 시대였으나 김기림과 이상의 세계는 망국 조선의 현실 앞에 암울해진다. 찬란한 제국의 빛과 식민지의 깊은 그늘은 마주 보며 질주하는 두 대의 기관차, 충돌은 한 시인의 죽음과 또 다른 시인의 애도를 기록한다.
<쥬피타 追放>
(李箱의 靈前에 바침)
芭蕉 잎파리처럼 축 느러진 中折帽 아래서
빼여 문 파이프가 자조 거룩지 못한 圓光을 그려 올린다.
거리를 달려가는 밤의 暴行을 엿듣는
치껴올린 어께가 이 걸상 저 걸상에서 으쓱거린다.
住民들은 벌서 바다의 유혹도 말 다툴 흥미도 잃어버렸다.
깐다라 壁畫를 숭내 낸 아롱진 盞에서
쥬피타는 中華民國의 여린 피를 드리켜고 꼴을 찡그린다.
‘쥬피타 술은 무엇을 드릴가요?’
‘응 그 다락에 언저 둔 登錄한 思想을랑 그만둬.
빚은 지 하도 오라서 김이 다 빠젔을걸.
오늘 밤 신선한 내 식탁에는 제발
구린 냄새는 피지 말어’.
쥬피타의 얼굴에 絶望한 우숨이 장미처럼 히다.
쥬피타는 지금 씰크햇트를 쓴 英蘭銀行 노오만 氏가
글세 大英帝國 아츰거리가 없어서
장에 게란을 팔러 나온 것을 만났다나.
그래도 게란 속에서는
빅토리아 女王 直屬의 樂隊가 軍樂만 치드라나.
쥬피타는 록펠라 氏의 庭園에 만발한
곰팽이 낀 節操들을 도모지 칭찬하지 않는다.
별처럼 무성한 온갓 思想의 花草들.
기름진 장미를 빨아먹고 오만하게 머리 추어든 恥辱들.
쥬피타는 구름을 믿지 않는다. 장미도 별도……
쥬피타의 품 안에 자빠진 비둘기 같은 天使들의 屍體.
거문 피 엉크린 날개가 輕氣球처럼 쓰러젔다.
딱한 愛人은 오늘도 쥬피타다려 정열을 말하라고 졸르나
쥬피타의 얼굴에 장미 같은 우숨이 눈보다 차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었다.
아모리 따려 보아야 스트라빈스키의 어느 拙作보다도
이뿌지 못한 도, 레, 미, 파……인생의 一週日.
은단○와 조개껍질과 金貨와 아가씨와
佛蘭西 人形과 몇 개 부스러진 꿈 쪼각과……
쥬피타의 노름감은 하나도 자미가 없다.
몰려오는 안개가 겹겹이 둘러싼 네거리에서는
交通巡査 로오랑 氏 로오즈벨트 氏 기타 제씨가
저마다 그리스도 몸짓을 숭내 내나
함부로 돌아가는 붉은 불 푸른 불이 곳곳에서 事故만 이르킨다.
그중에서도 푸랑코 氏의 直立 不動의 자세에 더군다나 현기ㅅ증이 났다.
쥬피타 너는 世紀의 아푼 상처였다.
惡한 氣流가 스칠 적마다 오슬거렸다.
쥬피타는 병상을 차면서 소리첬다
‘누덕이불로라도 신문지로라도 좋으니
저 太陽을 가려 다고.
눈먼 팔레스타인의 殺戮을 키질하는 이 건장한
大英帝國의 태양을 보지 말게 해 다고’
쥬피타는 어느 날 아침 초라한 걸레 쪼각처럼 때 묻고 해여진
수놓은 비단 形而上學과 체면과 거짓을 쓰레기통에 벗어 팽개첬다.
실수 많은 인생을 탐내는 썩은 體重을 풀어 버리고
파르테논으로 파르테논으로 날어갔다.
그러나 쥬피타는 아마도 오늘 세라시에 陛下처럼
해여진 망또를 둘르고
문허진 神話가 파무낀 폼페이 海岸을
바람을 데불고 혼자서 소요하리라.
쥬피타 昇天하는 날 禮儀 없는 사막에는
마리아의 찬양대도 분향도 없었다.
길 잃은 별들이 遊牧民처럼
허망한 바람을 숨 쉬며 떠 댕겼다.
허나 노아의 홍수보다 더 진한 밤도
어둠을 뚫고 타는 두 눈동자를 끝내 감기지 못했다.
≪초판본 김기림 시선≫, 김기림 지음, 김유중 엮음, 100~104쪽.
이 시에서 김기림은 이상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자신의 친구 이상을 고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 중의 신, 최고의 신인 주피터에 비유한다. 그러나 신이 자신의 실력을 마음대로 발휘하기엔 당대의 사정이 너무나 열악했다. 사람들은 몰라보고 외면했다. 최고이되 최고일 수 없었던 주피터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주피터의 죽음을 추방에 빗대어 시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쥬피타 추방>이다. 자신의 진정한 친구였던 이상의 영전에 바친 최고의 찬사이며 조사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친구였나?
이상은 불우한 천재였다. 그의 시대에 인정받기는커녕 오해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유일한 문우가 김기림이었다. 김기림에게 보낸 여섯 통의 편지에는 내면의 애절한 사연이 고스란히 담겼다. 김기림은 그의 진가를 알아본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김기림은 누구인가?
193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이며 이론가다. 특히 영미 쪽의 신고전주의,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즘 문학을 수입, 소개하고, 이를 당대 조선 사회와 문단의 현실에 맞게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문학의 출발은?
1930년 조선일보사 입사와 더불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글은 1930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몇 차례 조선일보에 연재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라는 글이다. 1936년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북제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영미 모더니즘에 대한 본격 지식을 쌓고 귀국한다. 그때부터 모더니즘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키워드는?
모더니티, 즉 근대성에 대한 이해다. 등단 무렵부터 조선 사회에 결여된 것이 모더니티에 대한 이해라고 보고, 이를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개와 더불어 근대 그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서구 근대에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예감하고 자신이 도입한 모더니즘의 용도 폐기를 주장했다.
그의 모더니즘은 무엇인가?
근대를 대표하는 문학적 경향이다. 근대 문명에 대한 감수와 역사 발전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밝음, 명랑함, 희망참이다. 시집 ≪태양의 풍속≫에 그 구체적인 면면이 드러난다.
왜 모더니즘이었을까?
당대 세계 정세를 볼 때 서구적 의미의 근대가 세계적인 지배 질서가 되는 것이 자명했기에 문학 분야에서 이러한 사조의 도입은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계기는?
분명치 않다. 일본 유학과 신문기자 경력이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결과였을 것이다.
당대 모더니즘 시인들이 다 그랬나?
대개는 시작 활동에만 주력했지만, 그는 창작뿐만 아니라 이론 면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시론에서의 성과는?
시론가, 시 비평가로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해방 후 우리말의 어문 규정과 문체, 어휘 등의 연구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시와 시론 가운데 어느쪽이 더 앞섰는가?
김기림의 성가를 더 높인 것은 시론이다. 그러나 대표작인 <기상도>나 <바다와 나비>, 그리고 친구 이상에 대한 추모시인 <쥬피타 추방>은 시사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평가는?
송욱은 ≪시학평전≫에서 이렇게 평했다.“반세기 남짓한 우리 근대시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과학 정신’ 혹은 ‘객관주의’를 소리높이 부르짖으며 시의 근대성을 강조한 점에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기림을 들 수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 또한 비평가로서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그보다 더 뛰어난 시인은 이 나라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뛰어난 시의 비평가를 이 나라의 신문학사에서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실상 그는 이 나라에서 자기 나름으로 근대적 시 이론을 소개한 거의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모더니즘은 김기림 이후 어떻게 전개되나?
전후 문단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반기 동인’들, 그리고 뒤를 이은 박인환이나 김수영, 김종삼의 등장이 그렇다. 1960년대 이후 각 대학 국문과에 본격적으로 현대시 관련 강좌들이 정비, 개설되고 근대 서구 문학 이론이 도입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서구 문학 이론 수입이 긍정 현상인가?
일방적으로 서구 문예 이론의 영향을 입은 서구 추수주의자는 아니다. 기준이나 내발 동기 없이 이루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서구 이론을 끌어들였고 그 이론의 시대적 유효성이 다했다고 판단했을 때 탈피를 선언했다. 그런 점에서 그와 그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서 시대적 선구의 위치를 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유중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