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이성선시선
한국 시 신간 ≪초판본 이성선 시선≫
나는 벌레다
껍질을 벗는 벌레다. 굶주림의 껍질, 슬픔의 껍질, 욕망의 껍질, 고통의 껍질, 죽음의 껍질마저 벗는 벌레다. 그러고 나면 불꽃으로 온 하늘에 타올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눈빛, 불이 되고 노래가 되는 벌레다.
나는 밤에만 존재하는 벌레여요
우주여, 나는 당신 품 안에 있어요
내가 한 자루 피리로 당신 품에 숨으면
존재하는 모든 영혼의 소리가 들려요
영혼의 소리가 내 안에 맑은 리듬으로 터져
불꽃처럼 아름답게 나를 열면
나는 껍질을 벗어요
굶주림의 껍질, 슬픔의 껍질, 욕망의 껍질, 고통의 껍질
죽음의 껍질마저 벗고 어둠을 벗어나요
어둠에서 벗어나 눈을 뜨면
하늘의 맑은 리듬이 샘물처럼 나를 열어요
이 몸이 하늘의 불꽃으로 타올라요
불꽃으로 온 하늘에 타올라
우주여, 당신 품 안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눈빛
불이 되어요, 노래가 되어요.
≪초판본 이성선 시선≫, 이성선 지음, 김효은 엮음, <불타는 영혼의 노래> 중 ‘벌레의 노래’, 31쪽
어떤 시인가?
<불타는 영혼의 노래> 중 ‘벌레의 노래’다.
이성선은 고요와 적막의 시인인가?
아니다. 그는 우주 바깥으로 확산, 확장되는 고요와 생명의 울림을 투명하게 시현한다.
어떤 시를 썼나?
현란하고 거추장스러운 수사가 범람하는 이 시대, 이 시단에 투명하고 맑은 우주의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의 시는?
우주적 정화의 시학이다.
어떻게 살다 갔나?
1941년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했다. 1·4후퇴 때 부친이 월북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속초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잠깐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시를 창작했다. 1988년 강원도문화상을, 1990년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고, 1994년 정지용문학상, 1996년 시와시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작품 활동은?
1970년 ≪문화비평≫으로 등단해 2001년 타계하기까지 선집과 공동 시집을 포함, 총 20여 권에 달하는 시집을 남겼다. 자연 그대로의 시, 영혼과 우주의 운율을 꾸밈없이 노래한 시가 많다.
무엇을 노래했나?
유일한 벗이요 생의 중요한 일부이자 전부인 자연이었다.
자연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마지막 시집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자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을 열면 언제나 / 거기 달이 떠 있지 / 그에게 차 한 잔 대접하듯 / 이 시집을 나의 평생 친구 / 달에게 바친다.”
‘아이 시인’, ‘우주 시인’이라고 부르던데?
시 세계 중심에 우주가 있고, 그 가운데 고요가 있고, 고요 안에 아이처럼 맑은 시심과 동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특징은?
우주의 풍경 소리를 머금은 아이 목소리나 웃음소리처럼 군더더기 없이 담박하고, 정갈하고, 아름답다.
그는 어디로 향했는가?
맑음을 지향하는 맑음, 우주를 지향하는 우주의 시학.
비평가의 시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불교 선 사상과 탈속, 자유정신 등을 논하면서 그의 시를 정신적인 것으로 고양 또는 신비화, 둘째 전통을 잇는 순수 서정시, 셋째 현실도피로 보고 비판.
현실도피 맞나?
모든 것에 초월한 듯 수행자, 혹은 신선 같은 시적 태도가 보인다. 그러나 삶과 죽음, 외로움과 슬픔에 대한 성찰이 없지 않다.
그는 무엇에 괴로웠는가?
어둠과 외로움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 준열하게 시를 썼다. 혼탁하게 들끓는 속세보다 우주율, 우주적 삶 하나에 더욱더 귀를 기울였다
‘밧줄’과 ‘벌레’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양가 의미다. 지상에 발이 묶인 인간 존재의 비극성 상징이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고 타계해 더 나은 영혼과 세계, 하늘과 우주로 표상되는 자유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매개체이자 몸부림이다.
무엇을 말했는가?
우주는 바깥에 있지 않다. 내 몸이 곧 우주고, 당신 또한 우주다. 우주를 담지한 채 우주를 연주하는 그의 시편이 있기에 우리 영혼도 정화되어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효은이다. ≪시에≫ 편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