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안회남 단편집
한국 현대 소설 문학 초판본 신간 <<초판본 안회남 단편집>>
안회남과 우리의 근대
아버지는 안국선이다. 20세기 초반 애국계몽운동가에서 친일문학가로 변신한다. 아들은 “야만적 식민정책에 쫓기어 자기 자신 속으로만 파고”들었다. 징용 다녀와서는 관점이 전환, 개인으로부터 사회로 눈을 돌린다. 민족의 아픔, 사회 모순이 작품에 나타난다. 월북했고 숙청당했다고 하는데 그의 나이 사십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나는 최근 아버님의 문필(文筆)에 대하야 완전히 고개를 숙이고 만 일을 당하였다. 이 어른이 젊어서 한시(漢詩)를 많이 지은 것과 나종 서울에 오셔서 ≪야뢰(夜雷)≫라는 잡지(雜誌)를 창간하시어 조선서는 제일 먼저 잡지 사업을 시작하셨다는 것도 일즉 차상찬(車相瓚) 선생께 들어 알고 있었던 일이요 여운형(呂運亨) 선생께 인사를 갔다가 아버님의 저서에 ≪연설법방(演說法方)≫이라는 책 있는대 전에 애독하야 마지않었다는 말슴도 즉접 들어 모르는 배 아니지만 ≪동물회의록(動物會議錄)≫이라는 어버님의 책이 이십오 년 전에 사만 부를 돌파하야 아직도 조선 출판계(出版界)의 최고 기록(最高記錄)이라는 것을 알고는 망연자실하여 있었다.
이것은 박문서관(博文書館) 노익형(盧益亨) 씨의 말로 어느 신문의 기사에서 읽은 것인대 현재의 나와 비슷한 년대로 하물며 이십오 년의 옛날에 사만 부식을 팔리게 하는 실력을 내셨거늘 내 아무리 신문학(新文學)이니 뭐니 떠들어도 부끄러움이 많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오늘날의 나의 무력함을 돌아보건대 어렸을 적의 것일망정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나의 작문이 아버님께 푸대접을 당하게 된 것도 미루어 알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아버님께서는 또 소설도 쓰셨다. 아직도 내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마는 ≪발섭기(跋涉記)≫니 ≪됴염라젼≫이니 전혀 우리 어머님 한 분을 독자(讀者)로 하야 읽고 심심해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야기책을 지어 주셨다. 그때 나도 그것을 읽어 봤으며 재미있다고 동내 부인네들이 여기서 저기서 빌려 가더니 나종에는 그냥 글자 하나 못 알아보게 떨어지고 말었던 것이다.
≪초판본 안회남 단편집≫, <명상>, 안회남 지음, 이성천 엮음, 80~81쪽
어느 대목인가?
<명상> 가운데 부친 안국선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소설이지만 신변성이 너무 강해 안국선의 전기적 사실을 연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당대 실존 인물도 거명돼 논픽션에 가깝다. 꺼림칙한 부분도 보이는데 ≪금수회의록≫을 ≪동물회의록≫으로 적은 것이 그렇다. 착각인지 소설적 가상의 장치인지 모를 일이다. 현재 제목만 전하고 실물은 전하지 않는 안국선의 필사본 작품 ≪발섭기≫와 ≪됴염라젼≫이 왜 후대에 전승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나온다.
안회남은 누군가?
1931년 ≪조선일보≫ 신춘현상문예에 <발(髮)>이 3등으로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1948년까지 80여 편의 중·단편소설과 80여 편의 평론을 발표했다. 신변소설 작가로 불린다. 상당수 작품이 유년 기억과 일상생활 경험을 매개하며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신변소설이란?
안회남 스스로는 ‘자신의 신변문학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식민지 정책에 쫓기어 자기 자신 속으로만 파고들어 간 문학’이라고 고백한다.
그의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초기 소설들은 ‘연애 이야기’, ‘가난한 이야기’, ‘결혼 이야기’, ‘아내 이야기’, ‘아들 낳은 이야기’, ‘동무 이야기’, ‘선친 이야기’ 등이다. 이 책에 실린 <연기(煙氣)>는 장티푸스에 걸린 친구의 아내를 애인과 함께 간호하는 이야기이며, <상자>는 아내 몰래 패물을 전당포에 맡긴 후 죄책감으로 방황하는 지식인의 내면을 그렸다.
아버지 안국선에 대한 이야기는 없나?
있다. 1937년 1월 ≪조광≫에 발표된 <명상>이다.
안회남 신변소설의 한계는 어디까지였나?
신변소설은 특성상 현실 모순 및 부조리를 총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지엽적·단편적으로 파악한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신변소설은 자칫 우울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위안 또는 자기만족의 차원으로 나아갈 요소가 다분하다.
작가의 소신은 무엇이었나?
“외람한 말인지 모르나 나는 소위 기성 문단, 특히 기성 작가를 멸시하는 자다”란 말을 했다. 기존의 소설 창작 방법을 철저하게 부정한 것이다. 동시에 신변소설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역설했다.
그에게 신변소설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안회남은 신변소설의 제약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의 실험’ 차원에서 그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신변소설을 두고 ‘우리가 문학에서 보고 느끼고 싶어 하는 사실을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신변소설을 떠나 본격 문학으로 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조그마한 고루를 지키기에 딴엔 정성을 다한다’고 말했다.
징용당한 적이 있나?
1944년 충남 전의에서 살고 있다가 주민들과 함께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탄갱(炭坑)으로 끌려간다. 해방 후에 나온 창작집 ≪불≫은 징용 체험을 주로 형상화했다. 이를 계기로 안회남의 소설은 기존 창작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문학의 대사회적 역할을 강화해 나간다.
작품 성향이 바뀌나?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주제와 형식 측면에서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 준다. <불>을 비롯한 몇몇 소설은 이른바 ‘징용 문학’이라고까지 불린다. 작가의 현실 인식이 확대된 것이다.
해방 정국에서 그의 문학 궤적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즈음 안회남의 문학은 시대적 현안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주의 관점에서 민족적·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해 저항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해방 후에 발표된 <불>, <쌀>, <소>, <사선(死線)을 넘어서> 등은 초기 작품이 지녔던 한계를 나름 극복하고 민족적 아픔과 혼탁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며 현실 비판적인 작가 의식을 선보인다.
신변소설은 버렸나?
아니다. 징용 문학 작품도 작가가 징용을 겪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신변소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것이다.
신변소설이 발전한 것인가?
당시 평론가 김동석의 분석에 따르면 1947년에 쓴 <폭풍(暴風)의 역사(歷史)>와 1948년에 쓴 <농민(農民)의 비애(悲哀)>에 와서야 ‘작가의 신변 체험과 사회의 총체적 전망을 균형 있게 제시하는 소설의 결실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살았나?
1909년 11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필승(必承)이다. 안국선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수송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휘문고보 시절에 훗날의 소설가 김유정을 만나 친구가 된다. 1926년에 안국선이 죽자 집안 사정이 안 좋아 학교를 중퇴했다. 그 뒤 개벽사에 입사해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근무한다. 이후 ≪제일선(第一線)≫, ≪신여성(新女性)≫ 같은 잡지를 거쳤고 상사회사(商事會社)에서 잠시 직장 생활도 했다.
해방 전후에서 월북까지의 흔적은?
충남 전의에서 살다가 1944년 9월 26일 농민 133명과 함께 징용당했다. 1년 후인 1945년 9월 26일에 귀국한다. 그해 12월엔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1946년부터 미군정이 남로당 계열의 문인들을 색출·검거하기 시작하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임화·이원조 등 조선문학가동맹 회원들과 함께 1948년 월북한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사이에 임화 등과 함께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성천이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