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단편집 초판본
정말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기보다 살아 견뎌내고 싶었다. 막바지였다. 철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굴욕만으로 살아온 인생, 사랑의 열락도 청춘의 영광도 예술의 명예도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정의와 역사의 법칙을 믿기에.
동대문서 고등계의 현의 담임인 쓰루다 형사는 과히 인상이 험한 사나이는 아니다. 저이 주임만 없으면 먼저 조선말로 ‘별일은 없읍니다만 또 오시래 미안합니다’쯤 인사도 하군 하는데 이날은 되빡 이마에 옴팍눈*인 주임이 딱 뻣치고 얹어 있어 쓰루다까지도 현의 한참씩이나 숙으리는 인사는 본 체 안 하고 눈짓으로 옆에 놓인 의자만 가리키였다.
현은 모자가 아직 그들과 같은 국방모(國防帽) 아님을 민망히 주믈르면서 단정히 앉었다. 형사는 무엇 쓰던 것을 한참 만에야 끝내더니 요즘 무엇을 하느냐 물었다. 별로 하는 일이 없노라 하니 무엇을 할 작정이냐 따진다. 글세요 하고 없는 정을 있는 듯이 웃어 보히니 그는 힐긋 저이 주임을 돌려보았다. 주임은 무엇인지 서류에 도장 직기에 골독해 있다. 형사는 그제야 무슨 뚜껑 있는 서류를 끄집어내여 뚜껑으로 가리고 저만 드려다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시국을 위해 웨 아모것도 않 하십니까?”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읍니까?”
“그러지 말구 뭘 좀 허십시오. 사실인즉 도 경찰부에서 현 선생 같으신 몇 분에게 시국에 협력하는 무슨 일 한 것이 있는가? 또 하면서 있는가? 장차 어떤 방면으로 시국 협력에 가능성이 있는가? 상관비가 어듸서 나오는가? 이런 걸 조사해 올리란 긴급 지시가 온 겁니다.”
“글세올시다.”
하고 현은 더욱 민망해 쓰루다의 얼굴만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두 뭘 허신다구 보고가 돼야 좋을걸요? 그 허기 쉬운 창씬(創氏) 왜 안 허시나요?”
수속이 힘들어 못하는 줄로 딱해하는 쓰루다에게 현은 역시 이것에 관해서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우리 따위 하층 경관이야 뭘 알겠읍니까만 인전 누구 한 사람 방관적 태도는 용서되지 않을 겁니다.”
“잘 보신 말슴입니다.”
현은 우선 이번의 호출도 그 강압관념에서 불안해하던 구금(拘禁)이 아닌 것만 다행히 알면서 우물쭈물하던 끝에
“그렇지 않어도 쉬 뭘 한 가지 해 보려던 찹니다. 좋도록 보고해 주십시오.”
하고 물러나 왔고 나오는 길로 그는 어느 출판사로 갓다. 그 출판사의 주문이기보다 그곳 주간(主幹)을 통해 나온 경무국(警務局)*의 지시라는, 그뿐만 아니라 문인 시국 강연회 때 혼자 조선말로 햇고 그나마 마지못해 ≪춘향전≫ 한 구절만 읽은 것이 군(軍)에서 말성이 되니 이것으로라도 얼른 한 가지 성의를 보혀야 좋으리라는 ≪대동아전긔(大東亞戰記)≫의 번역을 현은 더 망서리지 못하고 맡은 것이다.
심란한 남편의 심정을 동정해 안해는 어느 날보다도 정성 드려 깨끗이 치인 서재에 일본 신문의 기리누끼*를 한 뭉텡이 쏟아 놓을 때 현은 일직 자기 서재에서 이처럼 지저분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철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굴욕만으로 살아온 인생 사십, 사랑의 열락도 청춘의 영광도 예술의 명예도 우리에겐 없었다. 일본의 패전긔라면 몰라 일본에 유리한 전긔(戰記)를 내 손으로 주물르는 건 무엇 때문인가?’
현은 정말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기보다 살아 견듸어내고 싶었다. 조국의 적일 뿐 아니라 인류의 적이요 문화의 적인 나치스의 타도(打倒)를 오직 사회주의에 기대하던 독일의 한 시인은 모로토프*가 히틀러와 악수를 하고 독소중립조약(獨蘇中立條約)이 성립되는 것을 보고는 그만 단순한 생각에 절망하고 자살하였다 한다.
‘그 시인의 판단은 경솔하였던 것이다. 지금 독소는 싸우며 있지 않은가? 미영중(美, 英, 中)도 일본과 싸우며 있다. 연합군의 승리를 믿자! 정의와 역사의 법측을 믿자! 정의와 역사의 법측이 인류를 배반한다면 그때는 절망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 옴팍눈: 옴팡눈. 옴폭하게 들어간 눈.
* 경무국: 일제 강점기 때 총독부 소속 경찰청.
* 기리누끼(きりぬく): 신문 스크랩.
* 모로토프: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Vyacheslav Mikhailovich Molotov, 1890∼1986). 소련의 정치가, 외교가. 1920년대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인민위원회 의장을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