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웅
러시아 소설 신간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
나는 쏘았다.
총알은 레르몬토프의 왼쪽 옆구리로 들어가 심장과 허파를 뚫고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다. 결투로 죽은 작가는 영웅과 악인 사이에 서식하는 인간의 본성을 불러낸다.
“그루시니츠키.” 나는 말했다. “아직 시간은 있네. 자네의 험담을 거두게. 그럼, 모든 것을 용서하겠네. 자네는 나를 바보로 만드는 데 실패했어. 내 자존심은 충족되었어. 우리가 언젠가는 친구였다는 것을 기억하게.”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눈이 불타올랐다.
“쏘게.” 그는 대답했다. “나는 나를 경멸하고, 자네를 증오하네. 만일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밤에 자네를 베어 버릴 거야. 이 땅에 자네와 내가 함께 숨 쉴 곳은 없어.”
나는 총을 쏘았다.
연기가 흩어지자, 그루시니츠키는 공터에 없었다. 다만 먼지만이 가벼운 기둥이 되어 절벽의 끝에서 일고 있었다.
“코미디는 끝났소!”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우리 시대의 영웅≫,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홍대화 옮김, 269쪽
누가 결투를 하는 장면인가?
‘나’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장교 페초린이다. 친구인 그루시니츠키가 그에 대해 험담을 한 것 때문에 마침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이 작품을 쓰고 얼마 후 작가 레르몬토프 역시 결투로 죽는다. 작가가 자신의 말로를 예언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페초린’이란 이름은 같은 작가가 쓴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에도 나오지 않았나?
≪우리 시대의 영웅≫에는 페초린과 더불어 베라 리곱스카야란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의 미완성 전작인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에도 나온 인물이다. 그래서 두 이야기를 연관된 이야기로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인물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단편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줄거리는?
성명 미상의 귀족 출신 여행자가 캅카스를 여행하던 중 막심 막시미치라는 러시아인 이등대위를 만난다. 그로부터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페초린이라는 이상한 귀족 장교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내 페초린이라는 인물을 직접 만나고 그의 수기를 우연히 입수한다. 여행자는 그 수기 속의 등장인물 이름만 바꾼 채 이를 출간한다는 내용이다. 수기 속에는 <타만>, <공작영양 메리>, <운명론자> 등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배경이 캅카스인데,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캅카스의 관계는?
캅카스는 19세기경부터 러시아가 점령하기 시작한 땅이다. 이곳에는 체르케스인, 체첸인, 오세트인,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인구시인, 카바르다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다. 그루지야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슬람교를 믿는다. 이들 민족은 러시아의 지배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레르몬토프도 이곳에서 복무했는데, 그때는 이 지역에서 저항 운동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다.
캅카스에서 저항 운동이 벌어지면 살벌할 것 같은데?
전쟁에 휘말린 지역이었지만, 러시아인들에게 이곳은 당대 낭만주의 사조와 맞물리면서,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낭만주의적인 ‘이국’으로 여겨졌다. 캅카스의 높은 산맥은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추구하는 당대 낭만주의적 사유의 정수를 표현해 줄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캅카스에 주둔했던 러시아군 사정은?
캅카스 주둔 러시아군을 흔히 ‘캅카스인’이라고 불렀다. 캅카스인은 ‘푸시킨의 ≪캅카스의 포로≫ 같은 작품에 매료되어 자원해 온 군인들’이다. 처음에 이들은 영웅적인 전공을 꿈꾸지만, 생각보다 전투가 드물고 일과가 지루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실망한 채 캅카스의 무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5∼6년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승진도 잘 안되고 성격은 점점 음울해지고 과묵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캅카스 현지 민족처럼 되어 간다.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캅카스 복무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등대위 막심 막시미치라는 인물과 캅카스의 관계는?
캅카스인의 전형이다. 러시아 귀족 출신이지만 캅카스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러시아적 요소와 귀족적 면모를 잃은, ‘반은 러시아인이고, 반은 아시아인이 된’ 독특한 계층의 일원이다. 레르몬토프는 막심 막시미치라는 선량하고 후덕하지만 나름의 한계를 지닌 생생한 형상을 창출해 냈다는 점에서 많은 칭송을 받는다.
페초린과 막심 막시미치가 만난 계기는?
페초린 대 그루시니츠키의 결투 때문이다. 이 결투로 인해 페초린은 다른 요새로 전출됐고 그곳에서 막심 막시미치를 만났다.
결투는 불법 아닌가, 당시 러시아의 시선은?
귀족들 사이에선 명예를 지키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사용됐다.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귀족들은 자신과 자기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모욕적인 언행에 대해 결투를 신청하지 않을 경우 비겁한 자로 낙인이 찍혔다.
결투에 등장하는 의사와 대위의 역할은?
의사와 대위는 양측의 입회인들이다. 보통 결투는 당사자들이 의뢰한 친구들이 입회인의 자격으로 미리 만나 화해를 시도해 본 뒤 화해가 결렬되었을 때 결투 조건을 결정했다. 대부분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에 만나 일을 치렀다.
러시아의 결투는 어떻게 진행되나?
20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향해 다가오다가 한 발씩 쏘는데, 다가갈 수 있는 거리는 10보에서 12보 정도까지였다. 티가 나도록 확연하게 땅이나 허공에 총을 쏘는 것은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빗맞힐 의도가 있더라도 교묘하게 쏘아야 했다. 가장 끔찍한 결투 조건은 6보 정도에서 쏘는 것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과 그루시니츠키는 6보 거리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단편 모음집’에는 어떤 단편이 실렸나?
이 작품은 <벨라>, <막심 막시미치>, <타만>, <공작영양 메리>, <운명론자>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단편 모음집’이다. <막심 막시미치>와 <타만> 사이에 <페초린의 수기>를 출판하는 여행자의 <서문>과,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판될 때 작품 전체에 대해 쓴 <저자 서문>이 들어감으로써 작품이 완성된다. 해외의 일부 영문판 및 국내 일부 번역판은 이 체재를 엉성하게 구성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원전의 구성을 그대로 따랐다.
레르몬토프의 단편 모음집이 당시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받은 이유는?
‘단편 모음집’은 1830년대에 러시아에서 등장한 장르다. 보통 ‘단편 소설 모음’ 장르는 각 단편이 서로 다른 서술자를 지니고, 인물들과 플롯상 상호 관련이 없는 사건들을 다룬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시대의 대표자인 한 주인공을 각 단편의 핵심인물로 배치하여 작품 전체를 관통하게 하고, 여행자를 화자로 설정함으로써 원거리에서 근거리로 차츰 주인공에게 접근하는 식으로 단편들을 연결한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영웅’은 어떤 인간을 말하는가?
보수적 비평가 부라초크와 셰비료프는 제목 속의 ‘영웅’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레르몬토프가 페초린같이 부도덕하고 악한 인물을 시대의 영웅으로 제시했다면서 페초린은 레르몬토프 자신의 초상일 뿐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대해 레르몬토프는 소설 맨 앞에 붙인 <저자 서문>에서 작가의 숨은 의도와 아이러니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을 비웃는다. 작가는 제목을 통해 페초린을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영웅’이란 일종의 반어법으로 보인다.
페초린이 영웅이 아니라 악인이란 말인가?
작가는 페초린이 분명 악인이고, 페초린의 문제는 한 사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세대의 문제라고 천명한다. 그가 그렇게 추악하게 비치는 원인은 그의 악 속에 전 세대에 내재한 악이 완전히 발전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페초린의 악행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쉽게 말해 페초린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역경을 겪는다. 벨라는 페초린에게 납치되었다가 버림받은 뒤 카즈비치에게 피살된다. 막심 막시미치는 페초린의 버릇없는 행동에 수모를 당했으며, 타만의 밀수업자들도 페초린에게 일이 발각돼 소동을 겪는다. 또 결혼할 마음도 없으면서 공작영양(公爵令孃) 메리를 유혹한 뒤 차갑게 버린다. 결투에서 그루시니츠키를 죽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불리치 또한 페초린에 의해 죽음이 예견된 뒤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악행에 대한 고찰을 다룬 작품인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할지 모른 채 타인의 삶에 파괴적인 역할만을 하는 시대적 주인공의 모습을 페초린에 투영한 작품이다. 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악행만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 죄성과 그것에서 오는 절망·우수를 잘 표현한 형이상학적 작품으로도 읽힐 수 있다.
레르몬토프도 결투로 죽었나?
일찍이 사관학교 동기인 마르티노프의 집안과 오해가 있었다. 1837년, 마르티노프의 부모가 레르몬토프에게 ‘캅카스에 있는 우리 아들에게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러나 편지를 도난당하고 동봉되었던 300루블을 보상하려다 편지를 의도적으로 뜯어 보았다는 오해를 샀다. ‘여행짐을 도난당하기 전에 편지가 물에 젖어 내용물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지만 이것은 결투를 알리는 전조가 됐다.
편지 도난은 사실이었을까?
레르몬토프가 마르티노프의 편지를 잃은 곳은 타만이었다. 이 작품의 <타만> 편에는 페초린이 여행짐을 통째로 도둑맞은 얘기가 나온다. 이 사건은 레르몬토프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추정된다.
그는 결투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았나?
1841년 7월 15일 저녁 6시 산기슭에서 결투가 열렸다. 마르티노프가 쏜 총알은 레르몬토프의 왼쪽 옆구리로 들어가 심장과 허파를 뚫고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다. 마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던 입회인들은 마르티노프의 마차를 빌리려고 했지만, 자신의 행위에 겁을 먹은 마르티노프는 마차를 타고 도망쳤다. 그는 3개월만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당신은 누구인가?
홍대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논문 <레르몬토프의 소설들에 나타난 구성의 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레르몬토프의 미완성 소설인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