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4. 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2012년, 왜 이 책이었나? 3. 한국언론학회 희관언론상을 수상한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미디어를 이해해?
<<미디어의 이해>>는 유명한 책이다. 매클루언도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영어로 읽은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런데도 책과 저자는 날이 갈수록 유명세를 더해간다. 1964년에 출판된 이 낡은 책을 디지털 최전선의 전사 <<와이어드>>가 교범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읽지 않고는 대답할 수 없겠지만 글도 어렵고 내용도 그래서 쉽지 않았다. 김상호는 6년 넘는 시간을 이 책의 번역에 쏟았다. 470개의 역주가 달린 이 새로운 번역본을 한국언론학회가 올해 주목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직무 수행’이다.
“채플린, 조이스, 쇼팽, 파블로바, 엘리엇 그리고 샤를 부아예. 이 모든 사람들이 한 단락에 등장한다. 이 책은 사실상 요약이 불가능하다.” 테런스 고든
“그가 옳다면 우리는 어찌되나?” 톰 울프
“무엇보다도 가장 명석한 마케팅 마인드가 마셜 매클루언에게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언어를 즉각적인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으로 대체한 지금 시점에서 봐도 매클루언은 전자 문화가 가장 나중에 도달하게 될 것들을 노래한다.” ≪와이어드≫
이 책의 매력은?
볼 때마다 다른 시각과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다양한 학문 분야와 통섭하는 글쓰기와 연구가 무엇인지 진즉에 보여준 책이다.
당신이 옮긴 <<미디어의 이해>>는 그전에 우리가 봤던 <<미디어의 이해>>와 무엇이 다른가?
1964년 맥그로힐에서 출판한 초판에는 매클루언의 새로운 서문이 없고, 출간 30주년 기념판인 MIT판은 해설이 덧붙여져 있을 뿐이다. 이 비평판처럼 각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본문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내용이 없다. 이 판본에는 매클루언 본인의 1, 2판 서문이 모두 실려 있고, 이 책과 관련된 다른 자료들이 부록으로 추가되어 있다. 이 책은<<미디어의 이해>>를 입체로 이해할 수 있다.
번역에서 크리티컬 포인트는 무엇이었는가?
조사 ‘는’을 ‘가’로 바꾼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가 흔히 사용하던 ‘미디어는 메시지다’를 ‘미디어가 메시지다’로 바꾼 것 말인가?
그렇다. ‘는’이 조건적 느낌이라면 ‘가’는 정의적 느낌이다. ‘는’을 사용하면 미디어보다 메시지가 커진다. 그러나 ‘가’를 사용하면 미디어와 메시는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 자체로 메시지라는 뜻을 전달할 수 있다.
두 번째 결단은?
전환이나 변환으로 번역되었던 ‘translation’을 ‘번역’으로 옮긴 것이다. 매클루언에게 이 용어는 좀 특별하다. 그는 모든 미디어가 언어적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용어 번역은 신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것에 관해서만 연구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누구나 아는데 누구도 쉽게 읽지 못하는 책이다. 왜 그런가?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필독 고전 100선에 항상 꼽히는 책이다. 우리나라 주요 대학의 필독서에 빠지지 않고 선정된다. 그러나 읽다 보면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들다. 매클루언의 글쓰기가 매우 난해하고 내용이 쉽게 다가오지 않아서 그렇다.
그런데 이 책과 저자는 왜 모르는 사람이 없나?
책이 어려우니까 핵심 경구 몇 개를 위주로 그의 사상이 전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 문장만 기억하고 그것으로 이 책을 기억한다.
앞으로는 좀 쉬워지려나?
전자 미디어 세대들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활자 미디어 세대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다. 저자도 책 서문에 이미 이런 이야기를 써놓았다.
읽히지도 않는데 여전히 고전인 이유는?
이 책은 특정 사상이나 미디어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럼 뭘 설명하는 책인가?
그것이 어떤 미디어이든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 미디어와 인간 그리고 사회가 맺는 관계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구체적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탐색한 책이다.
1964년에 출판된 책이 오늘날에도 ‘매우 놀랍다’는 평을 듣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가?
그렇다. 언제나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유의미한 통찰을 얻게 된다. 그것이 어떤 미디어인가와는 관계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전히 “미디어가 메시지다”이다. 이 말은 이 책의 시작이고 끝이다. 흔히 ‘지구촌’이 이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이 책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나 명제가 아니다.
번역자는 읽기 어려운 책을 읽는 독자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조금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역주를 하나둘 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800여 개의 역주가 생겨서 일부 좀 줄였다. 그래도 470개의 역주가 달려 있는데,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비평판 편집자 테런스 고든은 누구인가?
매클루언 가족의 부탁으로 그의 전기를 집필한 매클루언 연구의 전문가다. 매클루언에 관한 입문서도 썼다.
이 책은 어떻게 만났는가?
대학원생 시절,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번역하신 임상원 선생님 연구실의 연구조교였다, 그때 선생님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빼든 것이 이 책과의 첫 만남이었다.
1997년 컴북스에서 출간된 <<미디어의 이해>>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일본에서 번역한 책을 번역의 대본으로 삼았다는 느낌이 너무도 강하게 들었다. 최초 번역이 감내할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우리 글과 말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미디어의 이해>>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나?
민음사의 번역은 그런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하고자 했고 많은 부분에서 진척이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앞서 번역하신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다만 두 분이 번역하신 탓에 전반부와 후반후의 문체나 번역의 느낌이 조금 상이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동의하기 힘든 개념어 번역들이 좀 있었다.
쉽지 않은 책의 번역을 결심한 계기는?
매클루언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막상 필요한 인용은 원전의 페이지를 달고 나 스스로 번역해서 인용했다. 그러다가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당신이 이 책의 번역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적임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출판사에서 집요하게 졸랐다. 이게 팩트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나?
준비 기간부터 따지면 6∼7년은 걸린 듯하고, 번역을 염두에 두고 본격적으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해서 정리한 시간부터 생각하면 3년 반쯤 걸렸다.
매클루언의 영어를 어떻게 옮겼나?
어려웠다. 그러다 마침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영문과 교수나 미술사, 과학사 교수에게 찾아가 짧은 영어로 묻곤 했다.
한 번 읽어서 알기 어렵다는 사람이 많다. 번역자라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한 번 읽어서 안 되면 여러 번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 번에 다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1부가 어려우면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어서 다소 덜 복잡한 2부를, 그것도 본인이 제일 궁금한 미디어부터 읽기 시작해서 재미를 붙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읽어도 이 책은 상관이 없다. 원래 성격이 좀 모자이크적이다.
여러 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
지금처럼 다양한 미디어가 생태계를 구성한 적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미디어의 동력에 포섭되어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떤 지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요즘 SNS를 사용하는 수용자들이 가끔 그 생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치료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의 법칙>>을 번역 중이라고 들었다?
<<미디어의 법칙>>은 매클루언의 생각이 최종적 형태로 정리된 마지막 책이다. 일종의 법칙처럼 제시되고 있는데, 더 살펴봐야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매클루언이 이 책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주장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마무리에 나온 책이라 상당한 중요성이 지닌 책이라고 생각한다.
부록. <<미디어의 이해>> 가운데 김상호의 옮긴이 서문
이 책은 매우 특별한 책이다. 출간된 지 반세기가 다 되어 가지만 그 내용이 갈수록 더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출간 당시에는 저자의 새로운 시각이 사회에 충격을 주어 주목을 받았다면 지금은 우리 주위의 미디어 현상을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는 해설서로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금뿐만 아니다. 이 책은 앞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새로운 미디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길잡이로서 그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것이 바로 고전의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을 현대의 고전으로 꼽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해석과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통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하려고 했던 것은 미디어라는 현상의 탐색과 탐험 그 자체였다. 한 방송 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당신의 철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은 매클루언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나는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내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 묻는다”고도 말했다. 그는 특정 이론을 설명하지 않는다. 미디어를 이해하는 ‘과정’에 이 책의 독자를 초대할 뿐이다.
매클루언은 라디오나 텔레비전 또는 전화 등의 개별 미디어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설정하는 미디어의 범주가 인간의 확장에 의한 모든 인공물을 포괄한다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각각의 미디어를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미디어의 이해’를 방해한다. 따라서 미디어의 이해를 위해서는 ‘미디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디어가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더 주목해야 한다. 그가 이 책의 곳곳에서 힘주어 말하는 것은 미디어 자체가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 낸 효과에 대한 것들이다.
매클루언이 미디어에 대해서, 특히 새로운 미디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디어 낙관론자 혹은 미디어 결정론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이 미디어가 인간과 사회에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를 비관론자까지는 아니라도 결코 낙관론자나 결정론자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 책의 곳곳에서 우리가 새로운 미디어의 메시지를 빨리 깨닫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미디어 폭발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미디어 교육의 교재다. 매클루언은 생선이 아니라 낚시를 이야기한다. 역자는 이 점이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역설적이다. 매클루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데,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매클루언의 글쓰기 방식이나 주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기 위해서는 읽어야 하는데 읽기 위해서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사상을 처음 만나는 독자는 책을 쉽게 읽지 못할 것이다. 독자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글쓰기 방식 때문이다. 그나마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서 쉬운 편이다. 출판사와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기존 책의 구성 방식을 어느 정도 수용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이해』보다 2년 먼저 출간된 『구텐베르크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는 통상적인 책의 구성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상투어에서 원형으로From Cliché to Archetype』라는 책은 사전 방식의 편집을 시도해 A에서 Z 순서로 내용을 배열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매클루언은 주註, Notes를 책의 중간인 ‘N’ 항목에 두려고 했지만 출판사의 만류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목차Table를 맨 앞이 아닌 ‘T’ 항목에 두는 것은 막지 못했다. 이런 글쓰기, 책 만들기 방식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이런 시도는 인쇄 문화의 정신 구조와 인식 방식에 대한 저자의 도전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책의 구성 방식이나 글쓰기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책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다른 책에 비해 덜하다고 할 수 있지만 『미디어의 이해』도 그가 추구하는 모자이크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 책을 모자이크적이라고 말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매클루언이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가진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부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미디어의 사례를 읽어야 한다.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그의 대표적인 주장이 나오는 1장을 비롯한 1부의 7개 장에는 매클루언의 핵심 주장이 잘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이해가 쉽지 않다. 2부의 내용을 읽고 난 뒤 읽으면 이해가 쉬워진다.
멀리서 봐야 더 선명해지고, 점을 더 많이 찍어야 더 분명해지는 점묘화 같다. 여기저기서 계통 없이 연결되거나 별안간 튀어나오는 여러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뒤로 가면 갈수록 통일된 하나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그리고 전신과 전화 등으로 장이 나뉘어 있지만 읽다 보면 그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저자가 구사하는 문학, 철학, 음악, 미술, 과학 영역의 방대한 인용에서 비롯된다. 이 책에는 매클루언의 주장과 공명하는 문학작품과 미술가, 음악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모자이크처럼 매클루언의 메시지를 보여 준다.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다면 이 책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수없는 사람과 주장과 이야기와 작품의 함의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왜 이 대목에서 이 사람이 나타나는가? 왜 이런 이야기나 작품이 등장하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런 다양한 분야의 모자이크적인 인용과 배치가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역자는 이 점에서 미디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은 미디어‘만’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인문학적인 공감 능력과 감수성이 없이는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깨달음과 파악이 힘들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분명히 훌륭한 미디어 고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역자로서의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기도 했다. 매클루언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보아야 하고, 보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는 역설 속에서 괴로워하던 역자가 선택한 탈출구는 다소 과감한 역주 달기였다. 원전 전체의 의미나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가장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이 책의 역주다. 역주가 독서를 방해하는 성가신 존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번역서라는 것이 이미 역자라는 미디어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원전과는 또 다른 미디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주저 없이 역주를 달았다. 마무리 과정에서 너무 과하다 싶어 일부는 줄이기도 했지만, 책 읽기에 방해가 된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매클루언은 모든 미디어가 본질적으로 언어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이 책 6장, ‘번역자로서의 미디어’에 잘 드러난다. 매클루언은 자신의 박사논문을 구상하던 시기부터 후기의 책에까지 이런 생각을 이어 왔다. 이 때문에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번역’은 일반적인 용법보다는 그의 의도를 반영하는 특별한 의미가 더 강하다. 역주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에서 등장하는 번역이라는 용어는 변환이나 전환이라는 용어로 대체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미디어의 언어적인 본질을 생각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번역서로서 이 책도 이미 번역자라는 미디어를 만나서 원전과는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미디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역자가 아무리 매클루언의 의도를 존중하고자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내용은 매클루언이라는 미디어와 역자라는 미디어의 혼성물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