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영 시선 초판본
송영호가 안내하는 ≪초판본 장만영 시선≫,
유년의 모더니즘
장만영은 1930년대 우리 시단의 거의 모든 얼굴을 담고 있다. 현대의 언어로 전통의 기억을 불러낼 수밖에 없었던 이 시인을 세상은 전원적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라면 그곳에 미래는 없다.
生家
누륵이 뜨는 내음새
술지김이 내음새가 훅훅 품기든 집
방마다 광마다
그뜩 들어차 있는 독 안에서는
술이 끓었다
술이 읶었다
해수병을 앓으시는 어머니는
숨이 차서… 기침이 나서…
겨을이면
요를 둘른 채
어둔 등잔불 곁에서
긴긴 밤을 노상 밝히군 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신 뒤
몇 해를 두고 소식이 없으시고
오십 간 가까운 크나큰 집을
어머니와 두울이서 지키는 밤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어…
바람 소리
기와꼴에 떨어저 굴르는 나무 잎새 소리에도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도 쉬지 못하였다
≪초판본 장만영 시선≫, 송영호 엮음, 31∼32쪽
‘생가’라는 제목으로 시인이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의 유년 시절이다. 집에 대한 기억을 감각 이미지를 활용해 생생하게 묘사한다.
생가의 풍경에서 보이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의 발화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집이 오십 칸이나 되었나?
황해도 연백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첫 시집 ≪양(羊)≫을 비롯해서 모두 8권의 시집을 남겼으며, 신석정, 김광균, 박영희, 서정주, 정지용, 김기림 등 여러 문인들과 친교를 맺었다. 1948년에는 출판사 ‘산호장’을 경영했고, 조병화의 ≪버리고 싶은 유산≫ 등의 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
문단에는 언제 등장했나?
1932년 ≪동광(東光)≫지 5월호에 안서 김억(金億)의 추천으로 <봄노래>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의 시단은 1920년대에 열띤 대립을 보였던 카프와 민족문학이 쇠퇴하고 그 자리에 시문학파, 주지주의, 생명파, 청록파 등 다양한 유파가 등장한다.
이 시기 한국 시가 이념문학에서 순수문학으로 전향한 이유는?
일제의 사상 탄압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현실 비판적인 작품을 쓸 수 없었기에 문학의 예술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했다. 한국 현대시 연구자들은 장만영의 시를 “전원적 모더니즘”이라 본다. <바람과 구름>을 보면 양, 하늘, 은행나무, 산기슭, 구름 등의 자연 대상물을 소재로 하면서도, 역설적으로 ‘파아란 하늘’, ‘하−얀 구름’, ‘푸른 길’, ‘휫파람 소리’, ‘뻑국새 소리’ 등의 시각과 청각 이미지를 동원해 모더니즘의 시적 장치들을 수용했다.
모더니티를 추구하면서 도시와 문명을 외면하고 전원과 자연을 지향한 이유는?
어린 시절 부친은 사업으로 집을 비우고 어머니가 술도가를 운영하며 삼대독자인 그를 키웠다. 시인에게 생가, 즉 전원은 두려움과 외로움, 기다림과 그리움의 장소로 각인되었다.
시 세계 전반에서 들려오는 사모곡도 그 때문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바람과 구름>이나 <유년> 등의 시를 보면 시인은 어머니를 서정적 주체의 문제의식을 해소하는 절대적 존재자로 인식한다.
<바람과 구름>은 신석정의 시와 상당히 유사한데?
등단 추천인인 안서 김억과 만난 것을 시작으로, 장만영은 김영랑, 서정주, 오장환, 이육사, 김광균, 김기림 등 많은 문인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 이들을 통해 다양한 시 창작 방법론을 모색했다. 그중에서도 신석정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쉽게 쓴다는 말인가?
두 시인 다 어려운 용어를 써서 시를 미화하지 않고 일상어, 또는 우리말로 시화한다. 또 자연을 미화하고 자연을 자주 동경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시적 풍경을 회화적으로 제기한다. 감각은 현대적일지라도 도시적 소재를 배제해 일종의 ‘원초적인’ 정서가 많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절대자의 존재로 표상하며, 문답법 혹은 돈호법의 수사적 장치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1930년대 시단에 나타나는 주요 시작 기법 거의 모두가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이유는?
초기 시편들은 김영랑, 이하윤, 정지용 등이 참여한 ≪시문학≫파의 순수 서정시의 면모를 간직하며 동시에 김기림, 김광균 등의 이미지즘 계열 시적 특성을 강하게 환기한다. 또 서정주, 유치환, 오장환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시적 초월의 기표, 정신의 내면 탐구와 청록파의 시 세계가 중첩된다. 그의 시는 시적 언어의 확대와 현대시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가능해진 1930년대 시사의 특성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장만영의 대표작이 뭔가?
대표작으로 <달, 포도, 잎사귀>가 있으며, ≪양(羊)≫, ≪축제≫, ≪유년송≫, ≪밤의 서정≫, ≪저녁 종소리≫, ≪장만영 선시집≫, ≪놀 따라 등불 따라≫, ≪저녁놀 스러지듯이≫까지 모두 여덟 권의 시집을 남겼다.
시집 제목 글자 수가 한 자씩 많아지는데?
의도적인 것이다. 첫 시집 ≪양≫에 발표된 시 <달, 포도, 잎사귀>는 장만영이 가장 아끼던 대표작으로 제목의 단어까지도 글자 수가 한 자씩 많아진다.
≪초판본 장만영 시선≫을 묶어 낸 이유는?
장만영의 시 세계는 몇몇 대표작 이외에는 일반 독자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채로운 그의 작품들이 소개되기를 희망한다.
당신은 누군가?
송영호다. 문학평론가이고 경희대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