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강신재(1924∼2001)는 소설가 손소희를 통해 1949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문예≫지에 <얼굴>과 <점순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데뷔 이후 그녀는 1994년에 상재한 역사소설 ≪광해의 날들≫에 이르기까지 90여 편의 중·단편과 30여 편의 장편 등 도합 12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강신재는 흔히 박경리, 손소희, 한무숙 등과 더불어 1960∼1970년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중의 한 명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에는 강신재 소설의 미학적 특장들, 즉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문체 구사, 사랑과 성을 매개로 한 현실 부정과 비판적 사회의식, 여성의 정체성 탐구 및 고유성 회복 의지 등의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인물과 대상과의 거리를 적정하게 유지하면서도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밀도 있게 그려내는 실력은 발군이라고 하겠다.
강신재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평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0년 1월 ≪사상계≫ 78호에 발표한 <젊은 느티나무>를 통해서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감각적인 문구로 시작되는 이 작품을 계기로 강신재는 오랫동안 ‘비누 냄새’를 환기하는 작가로 대중들에게 기억되어 왔다. 또한 작가 자신이 “젊고 건강한 청년에게서 순간 풍기는 비누 냄새가 감각적인 것 같아 메모를 해놓은 것이 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동기가 되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이 소설에는 강신재의 감각적인 분위기 창출 능력이 십분 발휘되고 있다. 강신재가 동시대의 다른 여성 작가들에 비해 독자들에게 비교적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젊은 느티나무>는 젊은 남녀, 현규와 숙희의 사랑을 여성 화자의 시점으로 담백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주인공인 숙희와 현규는 서로에게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아니 결코 드러낼 수 없다. 부모의 재혼으로 둘은 이복남매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의 감정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거듭한다. “ ‘오빠’, 그는 나에게는 그런 명칭을 가진 사람이었다”라는 현실법칙과 “현규를 사랑하는 일 가운데에 죄의식은 없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었다”는 사랑의 욕망 사이에서 그들은 방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은 사실 작가 강신재가 궁극적으로 놓여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강신재의 작품 세계는 현실의 보편적 가치 질서를 넘어선, 인간 존재의 본원적 정체성과 낭만적 사랑의 ‘진실’을 추구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작가적 경향은 <젊은 느티나무>도 예외가 아니다. 결국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서 이들의 사랑을 허락한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의 대목은 숙희와 현규의 사랑이 긍정적으로 전개될 것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이 같은 소설의 결말, 또는 작가의 선택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이는 성과 사랑에 대한 기존 사회의 질서 체계에 대한 전면 부정 및 저항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소재인 이복남매의 사랑을 다룬 <젊은 느티나무>는 기존의 관습 체계와 규범 가치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작품 전반에 작가의 섬세한 정서와 감각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은 “이전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소설적 양태와 새로운 연대에의 지향을 드러낸 매우 중요한 작품” 혹은 금기시된 “감정의 좌절을 그리면서도 정갈하고 깨끗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주인공의 안에서 일정한 양의 거리를 두는 소설 기법상의 효과”라는 문단의 긍정적 평가를 동반하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자평
강신재의 작품은 많은 경우, 여성 화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동시대 여성들의 삶과 의식을 대변하고자 하는 작가 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지은이
강신재는 1924년 5월 서울 남대문로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아버지와 신여성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출생한 그녀는, 1930년에 함경도 청진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낸다. 1937년 부친이 별세하자 다시 서울로 돌아와 경기여고와 이화여전에 진학한다. 이화여전 가사과 2학년을 중퇴하고 결혼한-당시 이화여전 학생들은 학칙에 따라 재학 중에는 결혼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후 친구의 권유로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책벌레’로 불리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가던 강신재는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예>지에 <얼굴>(1949. 9)과 <점순이>(1949. 11)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강신재의 첫 작품은 1949년 7월 ≪민성≫에 발표한 <분노>로 알려져 있지만 대다수의 작가 연보를 참조할 때 <얼굴>과 <점순이>를 통해 정식 등단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에는 단편소설을 꾸준하게 발표하며 단편집 ≪희화(戱畵)≫(1958), ≪여정≫(1959) 등을 출간했다. 그리고 ≪여정≫을 출간하던 해에 단편 <절벽(絶壁)>으로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부터는 주로 중·장편 소설을 집필한다. ≪임진강의 민들레≫(을유문화사, 1962)를 비롯해 ≪청춘의 불문율≫(1960), ≪이 찬란한 슬픔을≫(1964), ≪그대의 찬 손≫(1965), ≪바람의 선물≫(1965), ≪신설(新雪)≫(1967), ≪숲에는 그대 향기≫(1969)와 펜클럽작가기금을 받고 쓴 ≪오늘과 내일≫(1966)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67년에는 ≪이 찬란한 슬픔을≫로 제3회 여류문학상을 받는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작가 강신재의 왕성한 작품 활동은 지속된다. 1970년에 그녀는 자신의 작가적 명성을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 널리 알린 단편 <젊은 느티나무>(사상계, 1960)를 제목으로 단편집 ≪젊은 느티나무≫를 엮는다. 아울러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장편 ≪파도≫(1972)를 간행한다.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특히 강신재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는데, 단편집 ≪황량한 날의 동화≫(1976)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밖에도 장편 ≪유리의 덫≫(1970), ≪북위 38도선≫(1973), ≪레이디 서울≫(1975), ≪서울의 지붕 밑≫(1976), 창작집 ≪그래도 할 말이/이 겨울≫ 등을 상재했다. 특히 1974년에는 ≪강신재 대표작 전집≫을 전 8권으로 간행했다. 한편, 강신재는 장편 ≪천추태후≫(1978)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사도세자빈≫(1981), ≪소설 신사임당/문정왕후 아수라≫(1987), ≪명성왕후≫(1991), ≪혜경궁 홍씨≫(1992)를 거쳐 ≪광해의 날들≫(1994)에 이르는 작품들은 강신재 특유의 감각적이고 신선한 문체를 바탕으로, 역사적 소재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역사소설들이다. 1994년 마지막 작품 ≪광해의 날들≫을 발표하기까지 강신재가 남긴 작품 수는 대략 중·단편 90여 편과 30여 편의 장편으로 집계된다. 1982년과 1983년에 각각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과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으로 피선되기도 했던 작가 강신재는 2001년 5월 12일 7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엮은이
이성천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에 강원도 춘천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문학 수업에 입문한다. 대학 시절에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둔한 학생이었다. 군사독재 정권의 야만적인 폭력과, 폭압적 현실에 저항하며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꿈’이 공존하던 시대임에도 동시대의 현실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는 강의실에 머무르며 시를 습작하거나 문학과 철학 책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문학의 본질과 비평의 윤리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실천적 변혁 의지가 암묵적으로 요구되었던 1980년대와 다원화된 가치가 인정되는 1990년대 사회를 두루 경험하고 난 지점에서, 본격적인 문학 공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광장의 언어’와 ‘밀실의 언어’ 또는 ‘보편과 개별이 창조적으로 융합된 언어(사유)’야말로 문학의 기원적 요소임을 그 시절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된 <알리바바의 서사, 혹은 소설의 알리바이>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시대 문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조명해 본 글이다. 삶의 면역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진지한 삶에 대한 둔감증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21세기 문학의 위상과 역할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박사 학위논문인 <황동규 시의 존재론적 의미 연구-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중심으로> 역시,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기획되었다. 개별 작가론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존재론적 의미를 고찰한 이 글은 언어와 사유, 시와 철학의 본질적 관계에 대한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한 바 있다. 이후에는 ≪시, 말의 부도(浮圖)≫, ≪한국 현대소설의 숨결≫, ≪작품으로 읽는 북한문학의 변화와 전망≫, ≪한국 소설의 얼굴≫(전 18권) 등의 저서와 공·편저를 출간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임 중이며, 계간 <시와 시학>, <시에> 등의 문예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울러 부질없는 욕망의 환각이 팽배해진 현대의 일상에서 인간의 본래적 삶에 대한 기억을 자극하는 비평적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1. 젊은 느티나무
2. 해방촌(解放村) 가는 길
3. 황량(荒凉)한 날의 동화(童話)
4. 강(江)물이 있는 풍경(風景)
5. 녹지대(綠地帶)와 분홍의 애드벌룬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명순은 지금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쎅스가 일으키는 트라불이고, 일종의 하찮은
시정(詩情)이었다. 모든 시(詩)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과장을 일삼고, 우상을 만들기에 옆눈도 안 판다. ‘완전한 인생’을 꿈꾸는 것이다.
-<황량한 날의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