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경수당집(警修堂集)≫은 시·서·화 3절(三絶)로 조선조 500년의 문예를 집대성한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의 시전집이다. 이는 목판이나 활판으로 간행된 바 없는 필사본(筆寫本)인데다가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별도의 원본이 확인되지 않아 정본(定本)이라 단정할 수 없는 채 몇 종의 이본이 전해질 뿐이다. ≪경수당집≫은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가 지적한 대로 자하의 차자(次子) 명연(命衍)이 수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경수당집≫은 자하 서거 1년 후인 1846년 연전(硏田) 정경조(鄭慶朝, ?∼?)가 필사하고 서문까지 쓴 것으로 추정된다. 매 권마다 권명을 붙이고, 작품마다 창작 시기를 밝힌 편년체 기록이다. 1면 10행, 매 행(每行) 20자씩 정갈한 해서체(楷書體)로 필사했으며, 자주(自註)는 1행간 2자씩 기입해 타 이본에 비해 가장 정밀한 편이다. 수록된 시는 총 4069수며, 차운시의 경우 원작을 밝히기 위해 ‘부원운(附原韻)’이라 하고, 원문보다 한 자 내려 기록하고 있다.
특기할 바는 자하 신위 연구의 선공인 손팔주 교수의 ≪신위 전집(申緯全集)≫이다. 손 교수는 정경조 필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본을 중심 자료로 조병의 필사 규장각본 외 각종 이본을 낱낱이 비교 및 대조해 이동(異同)을 밝혀 교정했고, 각 작품에 대한 작시 연대를 서력으로 환산해 기록했으며, 1권부터 85권까지의 일련번호를 면수(面數)로 했다. 또한 전 작품에 구두(句讀)를 첨가하는 완벽은 물론, 총 목차와 함께 전체 시제(詩題)를 음별로 색인까지 작성해 1983년 태학사에서 자료편 4권, 연구편 1권으로 공간해 자하 시 연구의 기틀을 제공했다.
본 ≪신자하 시선≫은 ≪경수당집≫의 4069수 중 76수를 가려 뽑았으며, 그 기준은 유소입두론(由蘇入杜論) 및 청나라 문사들과의 교유, 나아가 시·서·화 3절로서의 작가적 위상을 보여 주는 것과 우리 문학사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것으로 했다. 신위가 내세운 유소입두(由蘇入杜)와 더불어 그의 남다른 가문의식, 자유분방한 풍류를 느껴볼 수 있다.
200자평
≪경수당집(警修堂集)≫에 수록된 4000여 수의 시 가운데 76수를 가려 뽑았다. ≪경수당집≫은 창강 김영택에 의해 ≪신자하 시집≫으로 정선되기도 했으며, ≪경수당 시선≫, ≪신자하 시초≫ 등 다양한 선집으로 발간되었다. 신위가 내세운 유소입두(由蘇入杜)와 더불어 그의 남다른 가문의식, 자유분방한 풍류를 느껴볼 수 있다.
지은이
신위의 시조는 장절공(壯節公) 평산(平山) 신숭겸(申崇謙, 877∼927)이며, 가계는 14세(世)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1374∼1446)를 중시조로 하는 문희공파다. 신개는 태조 2년(1393) 식년문과에 급제, 세종 29년(1447)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후 서울의 귀족으로 누대에 걸쳐 학자·문인·예술가·장군 등이 배출되었다. 부 신대승(申大升, 1731∼1795) 역시 영조 38년(1762) 진사 급제에 이어 경연시 문과에 장원하고, 영조 52년(1776) 승지, 정조 8년(1784) 가선대부의 가자(加資)를 받았고, 이어 사헌부대사헌,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했다.
자하의 외가는 물론 처가 역시 당대의 명문이었으며, 특히 장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뛰어난 서화(書畫)는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자하는 이같이 가규(家規)가 드높은 경화사족의 가문에서 영조 45년(1769) 8월, 한성 장흥방에서 대승의 차남(次男)으로 출생했다. 자를 한수(漢叟), 호는 홍전(葒田)이라 했다가 후에 자하라 했다. 창강이 찬한 <연보>에 의하면 “그가 어려서 경기 시흥의 자하산 별야에서 수학했으므로 ‘자하’로 자호했다” 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에 산견되는 남다른 가문 의식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취학은 “9세부터 시·서·화를 익히기 시작하여 삼절의 기틀을 잡았다” 한다. 특히 시는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신자하 시초발(申紫霞詩鈔拔)>에 의하면 “자하의 시는 그 처음은 우리 집안 참봉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가 옹방강을 흠모해 배우면서 비로소 스스로 유소입두를 주창했다(紫霞之詩 其始盖吾家參奉君, 其後入中國 服事翁覃溪 始自命由蘇入杜)”라 했다. 이건창이 말한 ‘오가참봉(吾家參奉)’은 곧 이광려(李匡呂, 1719∼1782)다. 그는 당시(唐詩)에 매진해 한때 시단의 거벽이었으니, 이만수(李晩秀, 1752∼1820)는 <참봉군제문(參奉君祭文)>에서 “시인으로서의 풍격을 도연명(陶淵明)에 견주었는가” 하며, “국초 3백 년의 문교를 받아서 이광려가 났다”고 극찬했다. 이처럼 그는 문(文)의 박지원과 동격으로 추앙되던 학시(學詩) 스승이었다. 따라서 자하 역시 명민한 학당파(學唐派)였다. 그러나 창강의 <연보>에 따르면 “처음엔 성당의 시를 배웠으나, 연경에 가 옹방강에게 시학을 묻고 돌아와 이전의 작품 일체를 버렸다(始學盛唐 後改學蘇東坡,悉棄前作)” 했고, 자하 스스로도 <후추류시 병서(後秋柳詩 並序)>에서 <전추류시>를 분고(焚稿) 운운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전 ≪경수당집≫ 소재 4천여 수의 시 작품은 연경으로부터 돌아온 1812년(공 43세) 이후의 작품이란 논법이거니와, 진실로 아쉽긴 그가 이광려에게 익힌 성당시 수용 여하를 가늠해 볼 수 없음이다.
옮긴이
김갑기(金甲起)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1972),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1975) 및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985).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교수를 지내고,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송강 정철의 시문학≫, ≪한국한시문학사론≫, ≪낯선 고전시가 찾아서 읽기≫,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 ≪동서 고전 연시≫(공저), ≪한문학사≫(공저), ≪한시(漢詩)로 읽는 우리 문학사≫ 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 ≪삼한시 귀감≫, ≪시로 읽는 사찰문화≫, ≪신자하 시집Ⅰ∼Ⅵ≫(공역), ≪한국 사찰 제영시≫, ≪대원집≫ 등이 있다.
차례
·서경에서 정지상의 운을 차하다(西京次鄭知常韻)
·참판 추사 김정희에게 부탁하다(屬秋史 金參判正喜)
·잔치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오는 배에서 짓다(宴退回舟作)
·청수 부용각에서(題淸水芙蓉閣)
·동파의 운을 차용하여 아들 팽석에게 부치다(寄男彭石, 用坡公韻)
·신계의 치행 이병규 동헌에서 짓다(題新溪李稚行秉奎東軒)
·왕재청이 손우거의 그림을 모방해서 보내 준 그림에 짓다(題汪載淸 寄惠倣孫雨居畫)
·12월 19일 조송설이 그린 동파상을 다시 그리고…(十二月十九日 重摹趙松雪畫東坡遺像…)
·상산 군민에게 빌려준 돈과 곡식을 탕감해 준다는 임금의 명령서 뒤에 쓰다(題象山軍民錢粮蠲蕩 啓下公事後)
·상산 40영(象山四十詠)
·윤유월 보름밤 달이 심히 밝아서(閏六月十五夜 月極明)
·새벽에 은대에 들어가다(曉入銀臺)
·담계 어른께 부치다(寄呈覃溪老人)
·담계가 금년 정월 27일 죽었다(覃溪以今年丁月卄七日亡)
·뒤에 지은 버들 시(後秋柳詩)
·북방의 풍속(貊風)
·태사묘에 가을 제사를 드리는데, 복초재집의 운자를 공손히 사용하여 짓다(太師墓秋享 恭述用復初齋集韻)
·진락공 이자현의 문수원 중수비(眞樂公 重修文殊院碑)
·고려 연복사 옛 종에 쓰인 가정 이곡 선생의 명에 차운하다(高麗演福寺古鐘 次李稼亭先生穀銘詩韻)
·서긍의 고려도경에 쓰다(題徐兢高麗圖經)
·고려 노국공주의 정릉 원찰 보제광통사비 탁본 뒤에 쓰다(題高麗魯國公主正陵願刹普濟廣通寺碑拓本後)
·화장사 법능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패엽경을 뒤지다 공민왕의 상에 인사드리고 짓다(華藏寺宿法能房 朝起閱貝葉經 謁恭愍像作)
·추밀 윤언국이 나에게 죽순을 먹어 보라고 주어…(尹彦國樞密 餉余竹筍…)
·벽로방에서 <청공도>를 보고 스스로 다섯 수를 화제로 짓다(碧蘆舫淸供圖 自題五首)
·아들 명연이 17세에 알성 무과에 올랐다(兒子命衍十七 登謁聖武科)
·난설 오숭량에게 보내 사례하다(寄謝吳蘭雪)
·세모에 희롱조로 동파집 운자를 차하다(歲暮戱次韻坡集)
·갑곶(甲津)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당 근체시를 뽑아 올리고, 공손히 책 뒤에 명에 따라 쓰다(奉睿旨 選全唐近體訖 恭題卷後 應令作)
·오난설이 부인 금향각에게 부탁해 부채에 산수를 그려 내게 보내왔기로 시로써 답해 사례하다(吳蘭雪 屬哲配琴香閣於扇面畫山水 寄余以詩荅謝)
·큰아들 명준이 진사에 합격하여 관청에서 이름을 부르던 날 기뻐 짓다(伯子命準 擧進士 唱名日 喜賦)
·동인 논시절구(東人論詩絶)
·소악부(小樂府)
·병서(幷序)
·11월 14일 첫눈이 내리자 스스로 묵죽을 그리고 화제를 쓰다 (十一月十四日 始雪自題墨竹)
명준은 극시를 맡고, 명연은 무고를 맡으니 희롱조로 한 절구를 지어 두 아이에게 보여 주다(命準典棘寺 命衍掌武庫 戱以一絶 示兩兒)
·뉘우치는 마음(悔心)
·무술년 8월 11일은 내 70세 생일이다. 침계가 분에 넘치게 오래 살라는 시를 주기에 원운을 차운해 사례하다(戊戌八月十一日 僕七十生朝也 梣溪侈以壽詩 卽用原韻爲謝)
·기남의 변승애 여사가 가냘프고 예쁘게 생겼는데, 필묵 시중들며 모시겠단다…(畿南卞僧愛女史 纖小娟慧情 願以筆墨 侍我…)
·죽사도위 김현근이 내게 산음 단산 오기보가 그린 지두화에 제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다(金竹史都尉賢根 以山陰吳丹山起寶 指頭畫 屬題)
·임금이 내려 주신 우유를 받고 공손히 절구 한 수 쓰다(御賜酪粥 恭紀一絶句)
·계묘년 초하루 아침(癸卯 元朝)
·병중에 외람되게 임금께서 연일 하문하시는 은총을 받고, 인해 녹용을 하사하셔 은혜를 기록해 시를 짓다(病中猥蒙聖上連日下問 因賜鹿茸 紀恩有詩)
·임금께서 예서 글자를 쓰라고 명령하고, 이어 나의 집에 서동 두 명과 부채를 보내 주시니 특이한 운수다(上命書進隷字 因賜臣家兩書童貢扇 異數也)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서늘함을 찾아간 청수부용각에서
홀로 읊노라. ‘붉은 꽃 푸른 못에 가득하다’고
이곳 생각만 해도 더위를 모르겠는데
문득 육조 때의 시구가 떠오르네.
새가 날았나, 한 점 푸른 빛 사라지고
물고기 헤엄치니 일천 금빛 물결 흩어지네.
자그만 관청에 맑고 시원한 경지가 열렸으니
바람 한 점 안 불어도 숲 그림자만 한들한들.
追凉淸水芙蓉閣
獨咏朱華冒綠池
對此不知三伏熱
令人却憶六朝詩
禽飛一點翠光去
魚戱千頭金色披
小署自開明瑟境
無風林影碧參差
-<청수부용각에서>, 13~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