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러시아 신학의 역사는 크게 여덟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10∼16세기로, 루시의 세례와 타타르의 침입, 수도원의 부흥, 이오시프주의자들과 자볼츠이들 간의 논쟁이 그 시대의 획을 긋는다. 러시아가 비잔틴의 유산을 받아들여 주변 문화와의 관계 속으로 진입하게 된 이 시기는 플로롭스키가 러시아 역사의 비극으로 인식한 비잔틴과의 단절로 마무리된다.
둘째 시기는 17세기로, 동란과 교회 대분열이 있었다. 플로롭스키는 이때를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모순된 시기로 묘사한다. 이 시기에 그가 러시아의 고질적인 영적 질병으로 진단한 종말론적인 예감과 분위기가 시작됐다.
셋째 시기는 18세기로, 표트르에 의한 대개혁이 단행되었다. 플로롭스키는 표트르 개혁의 본질을 서구화가 아닌 세속화로 규정하며 국가의 교회 통제와 종속화의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그러한 의도적인 정책의 결과 고사(枯死) 위기에 처하게 된 러시아 교회는 역설적이게도 수도원 운동의 발흥으로 영적 생명력을 얻게 된다.
넷째 시기는 러시아의 서구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전반의 알렉산드르 시대다. 플로롭스키가 주목하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성서협회의 성서 번역이었다. 그는 또한 설교와 신학 교육을 통해 당시 러시아 교회에서 탁월한 영적 지도력을 행사했던 필라레트의 인격과 활동에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이 시기의 중요한 결실들로서 그는 성서 신학의 확립, 신학과 철학의 결합, 역사의식의 각성을 든다.
다섯째 시기는 19세기의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철학 사상의 개화기다. 플로롭스키는 다양한 서클들의 발흥과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대립에서 시작해 키레옙스키, 고골, 호먀코프, 도스토옙스키, 레온티예프, 솔로비요프, 표도로프에 이르는 정교와 연관을 맺고 있는 작가와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일별하고 있다. 그는 ‘교회화’라는 일관된 규준을 가지고 이 역사적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독창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여섯째는 대개혁 이후 19세기 후반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시대다. 플로롭스키는 개인의 삶을 통해 시대의 첨예한 문제를 드러낸 인물로 톨스토이와 포베도노스체프를 주목한다. 이 시기는 특히 서구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색채를 띤 다양한 종파들의 탄생과 도덕주의 경향으로 러시아 신학이 위기를 맞이한 긴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일곱째 시기는 영적인 삶에 대한 종교적 관심이 급증한 세기말이다. 플로롭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종교철학협회의 활동과 상징주의에 속한 다양한 시인들, 그리고 종교철학자들의 사상을 정교와 연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망한다. 그는 이 시기를 솔로비요프와 독일 이상주의가 지배한 시대로 파악하면서 심리주의와 미학주의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여덟째는 혁명 이후 시기인데, 이 부분에서 플로롭스키는 역사적 대격변을 겪은 후 앞으로 러시아 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남겨진 과제에 대해 성찰하며 러시아 신학의 부흥을 촉구한다.
200자평
≪러시아 신학의 여정≫은 러시아 정신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안내서다. 이 책에서 플로롭스키는 고대 루시가 비잔틴으로부터 기독교의 유산을 받아들인 시기부터 혁명 이후 러시아 정신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던 1930년대까지를 일관된 시선으로 조망하고 있다.
지은이
게오르기 플로롭스키는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권위 있고 뛰어난 정교 신학자다.
오데사의 정교 사제이자 신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나 노보로시스크 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한 후, 1920년에 대학의 비상근 강사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프라하로 망명하게 되고, 그곳에서 게르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도, 그는 교부들에 대한 연구에 매진해 교부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점차적으로 형성된 그의 세계관은 당시 해외로 망명한 대다수의 종교적 인텔리겐치아들과는 달리 세속 철학이 아닌 신학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는 잠시 ‘유라시아주의’와 관련을 맺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서구와 서유럽 철학에 대한 유라시아주의의 조심스러운 부정적 태도가 그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쓰인 대표 작품이 ≪인간의 지혜와 신의 지혜(Человечечкая и Божественная мудрость)≫(1922)다.
1926년에 파리 신학교의 교부학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1932년에는 서유럽을 총괄하는 대주교의 성직을 받게 되어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때 교부들에 대한 두 권의 저서[≪4세기 동방의 교부들(Восточные Отцы Четвертого Века)≫과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비잔틴의 교부들(Визатийские Отцы от V до VIII столетия)≫]와 ≪러시아 신학의 여정≫(1937)을 출판했다. 그 밖의 저서들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Смерть на кресте)≫(1930), ≪기독교적 연합의 문제들(Проблемы христианского объединения)≫(1933) 등이 있다.
1948년에 미국의 대주교 페오필(Феофил)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이주해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후에는 학장직을 맡았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브루클린에 있는 성 십자가 그리스정교 신학교에서도 강의했다. 은퇴 후에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서 강의를 계속했다. 1979년 8월 11일 프린스턴에서 생을 마감했다.
옮긴이
허선화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노어노문학과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성서의 상호 텍스트성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 러시아문학연구소(일명 푸시킨 연구소)에서 도스토옙스키 연구의 권위자인 V. E. 베틀롭스카야의 지도를 받아 도스토옙스키 미학의 여러 문제들을 정교 콘텍스트 속에서 연구한 박사 논문을 썼다. 고려대학교와 부산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과 역사 등을 주로 강의해 왔다.
러시아의 기독교 문화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과 함께 ‘러시아기독문화 연구회’를 만들어 매달 독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공동으로 ≪바흐친과 기독교: 믿음의 감정≫(부산대학교 출판부, 2009)을 번역했다. 그 외에 ≪교회는 하나다≫(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러시아 신학의 여정≫(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를 번역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 나타난 심오한 기독교적 주제들을 연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동안 이 주제와 연관해 발표한 논문으로는 <조시마 장로의 형상에 나타난 정교 이콘화 특성의 연구>, <도스토옙스키 창작에 나타난 미 인식의 문제>, <도스토옙스키 후기 소설 속의 그리스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타난 신 인식의 변화>, <도스토옙스키 후기 소설 속의 수도원 공간> 등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Ⅰ. 러시아 비잔틴주의의 위기
Ⅲ. 17세기의 모순
Ⅳ. 페테르부르크의 대개혁
Ⅴ. 신학을 위한 투쟁
Ⅵ. 철학적 각성
Ⅶ. 역사학파
Ⅷ. 전야(前夜)
Ⅸ. 단절과 연결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0세기에 비잔틴은 결코 쇠퇴기에 있지 않았다. 반대로 비잔틴이 번영하고 부흥했던 시기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엄밀하게 말하면, 비잔틴은 당시 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문화적인 국가였다.
-25쪽
지난 세기의 후반기는 러시아 신학의 역사에서 결코 무기력과 쇠퇴의 시기였다고 불릴 수 없다. 그 시기에 매우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다. 사건들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시기는 혼돈스럽고 분열되고 불안했다. 잠자고 있던 시기가 아니라 반대로 고조되고 흥분된 시기였다.
-156쪽
역사적인 노정은 아직 다하지 않았고 교회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길도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비록 험난하지만 길은 열려 있다. 정교는 전승일 뿐 아니라 과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부여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누룩이자 자라나는 씨앗으로 우리의 의무이자 소명인 것이다.
-182~1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