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아우슈비츠 이후 시(詩)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아도르노(T. W. Adorno)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시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해 버린 아우슈비츠의 본고장 폴란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타데우시 루제비치(Tadeusz Różewicz, 1921∼)는 등단했다.
루제비치는 시를 쓰는 작업을 ‘죽음으로 다가서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체험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는 시작(詩作)을 통해 망각 저편의 고통스런 상처를 곱씹으며 그때마다 죽음을 상기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글쓰기는 죽음을 확인하는 처절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숨쉬기처럼 필수적이고 절실한 행위이기도 했다.
시를 쓰는 일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식되었던 전후(戰後) 폴란드 문단에서 루제비치는 역설적으로 글쓰기를 통해서 스스로의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또한 전시(戰時)에는 대학살의 현장으로, 전후에는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소련의 위성국가로 대변혁을 거듭했던 조국 땅을 지금껏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역사의 증인으로서 묵묵히 글쓰기를 고집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가 폴란드 문단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루제비치는 폴란드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극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폴란드 문단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루제비치의 시는 대부분 1인칭인 ‘나’의 입으로 고백하는 모놀로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상적인 자기연민을 배제한 건조하고 단조로운 어조는 때로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표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성급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내레이터인 ‘나’는 ‘유리창’이라는 보호막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기도 하고, 과거의 해묵은 상처를 끈질기게 헤집고 반추하는 역사의 증인을 자처하기도 한다. 또한 이율배반적인 현대사회에서 시와 시인은 무엇인가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한다.
이 책에는 타데우시 루제비치의 대표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인의 삶의 궤적과 더불어 수록되어 있다. 대학살과 전쟁의 기억이 시인의 작품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으며,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그 기억이 어떻게 굴절되고 작품 속에 또 어떻게 어우러졌는지, 그리고 시인이 일생 동안 일관되게 추구했던 주제는 무엇인지 한눈에 살펴보기 위함이다. 또한 아우슈비츠 이후 폴란드에서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 왔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00자평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가족을 잃고 동료를 잃고, 나치의 학살과 전쟁의 폐허, 사회주의의 폭압 정치를 모두 살아낸 루제비치. 그는 시를 써도 좋을 것인가, 살아가도 좋을 것인가, 웃어도 좋을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러나 결국 시를 쓰는 것만이 그의 생의 이유이자 목적이고 수단이었다. 고통, 죄책감, 분노, 좌절, 이 모든 감정을 오랜 시간을 들여 여과해 낸 시어는 단순하고도 솔직하다. 시에 대해,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뇌했던 시인의 고백이 여기 있다.
지은이
1921년 라돔스크(Radomsk)에서 태어난 루제비치는 1929년 폴란드를 강타했던 경제공황으로 인해 중등학교 수업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독서에 몰두하고, 학생신문에 부지런히 시를 투고하는 전형적인 문학 소년이기도 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고 폴란드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루제비치는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비밀리에 진행된 야간 수업을 들으며 1942년에 어렵게 학업을 마쳤다. 이후 루제비치는 1943년부터 1944년까지 2년 동안 형인 야누시 루제비치(Janusz Różewicz)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의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국내군(Armia Krajowa, AK)’에 가담해 적극적인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 1944년에는 사티르(Satyr)라는 필명으로 전장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노래한 처녀 시집 ≪숲 속의 메아리(Echa leśne)≫를 비공식적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발발한 바르샤바 봉기에서 루제비치는 평생 동안 자신을 옭아매며 고통을 안겨 주게 될 처참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형 야누시의 죽음이었다. 국내군에서 저항운동을 하며 몸소 겪었던 악몽 같은 전쟁의 기억,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에서의 형의 전사(戰死)는 이후 루제비치가 필사적으로 시작(詩作)에 매달리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루제비치는 자신의 온 생애를 다 바쳐 폐허의 잿더미 위에서 문학의 부활 가능성을 끊임없이 타진했던 작가였다. 시인이 겪어 내야만 했던 전쟁의 고통스런 체험은 시와 드라마, 그리고 체험 수기나 에세이, 회고록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빌려 끈질기게 예술적으로 형상화되었다. 루제비치와 같은 작가들이 폴란드에 있었기에 전쟁과 수용소의 상처는 생존자들 개인의 현재화된 기억 속에서 불완전하게나마 꾸준히 재현되면서, 다양한 시행착오 속에서도 조금씩 미학적 형태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옮긴이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 동유럽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 폴란드어문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바르샤바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를 지냈으며(1997∼2001),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평전-안녕하세요 교황님≫(바다출판사, 2004), ≪세계의 소설가Ⅱ-유럽·북미편≫(공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3) 등이 있고, 역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명상시집―내 안에 그대 안식처 있으니≫(따뜻한 손, 2003), ≪고슴도치 아이≫(보림출판사, 2005), ≪쿠오바디스 Ⅰ, Ⅱ≫(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5), ≪끝과 시작-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시선집≫(문학과지성사, 2007), ≪바다 한가운데서/미망인들≫(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루제비치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물방울의 모험≫(담푸스, 2010), ≪흑단≫(크림슨, 2010), ≪꼬마 악마의 위대한 변신≫(샘터, 2011) 등이 있다. ≪비단안개-김소월, 윤동주, 서정주 3인 시선집≫(Dialog, 2005)와 ≪김영하 단편선≫(Kwiaty Orientu, 2009)을 폴란드어로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폴란드 문학을 한국에 널리 알리고, 한국 문학을 폴란드에 소개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폴란드 문학의 특수성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폴란드 문학을 연구하는 동양의 학자로서 동서양의 문학 및 사상을 비교하는 연구에도 전념하고 있다. 논문으로 <폴란드 문학을 통해 살펴본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문학 속의 동양문화 열풍>, <폴란드 콜럼버스 세대와 윤동주의 저항시 비교 연구>, <폴란드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에 나타난 한국전쟁>, <폴란드 현대시에 나타난 일본 시가 하이쿠의 영향>,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와 노장사상의 상생적, 유기론적 자연관> 등이 있다.
차례
타데우시 루제비치의 작품 세계 ··········3
전쟁의 상흔과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전쟁 직후(1945∼1948) ·················5
생존자(Ocalony) ··············9
장미(Róża) ················12
한밤중에 비명을 질렀다(Krzyczałem w nocy) ···13
얼마나 좋은지(Jak dobrze) ··········14
나는 미치광이들을 본다(Widzę szalonych) ····15
따뜻하게(Ciepło) ··············16
귀환(Powrót) ···············17
소년 학살(Rzeź chłopców) ··········19
어린 시절을 환기하며(Wspomnienie dzieciństwa) ··20
증인(Świadek) ···············22
탄식(Lament) ···············24
검열의 속박에 갇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1949∼1955) ··············27
한국의 봄, 파종기에(Wiosenny siew na Korei) ···30
나무(Drzewo) ···············33
황금 산(Złote Góry) ·············35
사랑 1944년(Miłość 1944) ··········37
단어를 넘어서(Nad wyraz) ··········38
검은 버스(Czarny autobus) ··········40
핑계로부터(Wymówki) ············42
아물지 않는 전쟁의 상처와 기억의 반추(反芻): 해빙기(1956∼1959) ···············43
우리를 내버려 두라(Zostawcie nas) ·······45
부서진 것(Rozebrany) ············47
해결책(Wyście) ···············50
공포(Strach) ················51
기념비(Pomniki) ··············52
새로운 비교(Nowe porównania) ········53
짐을 벗어던지다(Zdjęcie ciężaru) ········55
나는 용기가 없다(Nie mam odwagi) ·······56
낯선 사람(Obcy człowiek) ··········58
생의 한가운데에서(W środku życia) ·······61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리고 시작(詩作)에 대한 끊임없는 정의 내리기: 1960년대 ······67
바쁜 일상 속에서(Wśród wielu zajęć) ······69
교정원(Korektka) ··············71
이력서에서(Z życiorysu) ···········73
웃음소리(Śmiech) ··············75
처음은 늘 숨겨져 있는 법(Pierwsze jest ukryte) ···76
풀(Trawa) ·················78
가시(Cierń) ················79
앎(Wiedza) ················82
나의 시(Moja poezja) ············84
시인이란 누구인가(Kto to jest poetą) ······87
새로운 운문(韻文)의 탄생(Powstanie nowego poematu) ··················89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현실−현대문명의 위기: 1970∼1980년대 ·················93
***(먼지 낀 유리창을 통해) ········95
***(꿈속에서) ·············97
문(Drzwi) ·················99
***(집 외벽의 출입문) ··········102
관통(Przenikanie) ··········105
밑으로 내려가는 중(Schodząc) ········107
***(아침에 일어나기) ··········109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114
갑자기(Nagle) ··············115
시(Wiersz) ················117
시(詩)에 관한 묘사(Opis wiersza) ·······120
침묵으로 말하기: 1990년대 ··········125
거울(Zwierciadło) ·············127
지금은(Teraz) ···············130
***(나의 시대는 갔다) ··········132
이런저런 생각(Coś takiego) ·········134
입에서 입으로(Z ust do ust) ·········135
***(처음엔) ·············138
기억(Przypomnienie) ············140
***(때때로 시란) ············142
세상과의 화해, 그리고 정체성의 회복: 2000년대 ··145
***(10년 전) ·············147
동화(Bajka) ···············152
덧붙이는 말 ················155
해설 ······················157
지은이에 대해 ·················164
옮긴이에 대해 ·················176
책속으로
과연 사랑에 관해서
써도 되는지
학살당하고, 모욕당한 이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과연 죽음에 관해서
써도 되는지
아이들의 올망졸망한 얼굴들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