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이 책은 1960년대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박순녀의 주옥같은 단편을 모은 책이다. 박순녀는 섬세한 여성의 정체성 자각을 바탕으로 지적인 문체를 구사하면서 당대 사회와 역사로 소설의 공간을 확대시킨 리얼리즘의 소설 세계를 보여준다. 기존의 많은 여성 작가들이 가족이나 애정 문제에 천착하는 상황에서 역사와 사회로 시각을 확대한 박순녀의 작품 세계는 이채로웠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영문과 출신인 박순녀는 작품의 곳곳에서 외래어라든지 이국 지명을 언급해 이국 취향의 이그조티시즘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국 취향의 이그조티시즘은 열악한 현실에 대한 절망과 비판, 근대성의 선진국에 대한 작가의 동경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박순녀의 소설은 크게 여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애정 문제나 소소한 일상을 다룬 작품, 한국전쟁이나 월남 체험을 다룬 작품, 일그러진 당대 역사나 현실 비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한 미군과 기지촌 문제를 다룬 작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공통적으로 박순녀의 소설에는 전통적 가족의 질서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 의지를 갖고 생활하는 학생이나 인텔리 여성이 흔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통적 가부장제의 도식적 틀을 거부하는 이러한 여성 인물은 전통적 가부장제를 뛰어넘어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여성 주체의 욕망을 적극 반영한 것이다.
200자평
이 책은 1960년대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박순녀의 주옥같은 단편을 모은 책이다. 박순녀는 섬세한 여성의 정체성 자각을 바탕으로 지적인 문체를 구사하면서 당대 사회와 역사로 소설의 공간을 확대시킨 리얼리즘의 소설 세계를 보여준다.
지은이
박순녀는 192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산여자사범학교를 수료한다. 1945년 해방 직후 박순녀는 미국에 대한 동경과 학구열 때문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단신으로 월남한다. 일부 가족들은 한국전쟁 중 월남한다. 이러한 월남 체험은 이후에 그녀의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외상적 체험으로 자리한다. 1950년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를 졸업한 박순녀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중앙방송국에서 5년간 일하면서 방송 드라마를 집필했고, 서울 동명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한다. 박순녀는 1958년 6월 <실비명>을 쓴 월남 작가인 김이석과 결혼한다. 김이석은 재혼이었다.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가난한 작가 김이석과의 결혼은 문학에 대한 그녀의 깊은 관심과 열정을 보여주는 사례다.
박순녀는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케이스 워카>가 가작으로 입선한다. 월간 종합지인 <사상계>에 1962년 <아이 러브 유>, 1964년에 <외인촌 입구>로 정식 추천되어 작가로 입문한다. 결혼한 지 6년이 되던 1964년 9월 남편 김이석이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고, 졸지에 미망인이 된 박순녀는 딸 하나를 키우며 생활과 창작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봉착한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박순녀는 꿋꿋하게 작품 활동을 지속해 나가면서 문단이 주목하는 여성 작가로 성장한다.
여성 작가들은 흔히 섬세한 감각과 문체로 가족이나 여성의 애정 문제 등 비교적 개인적 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박순녀는 이런 여성 작가와 달리 당대의 사회적·역사적 문제에도 천착하는 당찬 모습을 표출한다. 이것은 여성 작가를 여류 작가로 폄하하던 당대의 문단 분위기에 일침을 놓는 글쓰기 작업이었다. 여성 작가의 길을 걸으면서 여성 작가의 고정적 틀을 벗어버리고 문학적 세계를 확장시킨 박순녀의 작업은 이후 후대 여성 작가들에게 새로운 모범으로 자리한다.
박순녀는 1972년에 첫 번째 창작집 ≪어떤 파리≫를, 1976년에 두 번째 창작집 ≪칠법전서≫를 출간해 자신의 문학적 세계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이외에도 창작집으로 ≪로렐라이의 기억≫(1977) 등이 있다. 장편으로 ≪영가≫(1972), ≪마리아의 간통≫(1977), ≪스몰 보이≫(1980) 등이 있다. 박순녀는 장편과 단편을 골고루 썼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은 단편이었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박순녀는 소설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수필도 창작했고, 번역서도 여러 권 발간했다. 박순녀는 <어떤 파리>로 1970년 현대문학 신인상, 1988년 <비단 비행기>로 제14회 한국소설문학상, 1999년 <기쁜 우리 젊은 날>로 제15회 펜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기도 했다.
엮은이
최강민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평단에 나왔다. 현재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이자 비평 전문지 <작가와비평> 편집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학 제국≫, ≪탈식민과 디아스포라 문학≫ 등이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아이 러브 유
외인촌 입구
엘리제 초
싸움의 날의 동포
어떤 파리
귀향연습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홍재는 그 새벽에 악성의 주정을 부렸다. 위경련 환자처럼 방 안을 데굴데굴 헤매고 자기혐오로 소리를 내어 울기도 했다. 그는 X레이실 다락에서 곧장 계단 밑의 창고로 기어 내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체포당하는 행운을 가졌어도 그 속에서 나왔을 때 그렇게까지 비참하고 굴욕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타나지 않는 체포의 손길을 기다리며 원죄처럼 놓여날 날이 없는 공포 의식에 쫓기는 그는 그 속에서 문득 무수한 쥐 떼에 아연했다. 그놈들은, 그 하등동물 놈들은 그가 무력하다고 알자 상상할 수 없는 방자한 꼴로 그를 우롱했다. 떼로 밀려오고 떼로 밀려가고 고가(古家)가 썩어나는 것 같은 오물 냄새를 풍기는 그놈들은 그의 전신을 마구 타 오르려고 했다. 그가 손을 조금 움직여도 이놈들은 그의 약점을 아는 듯 와르르, 찍찍 간담을 서늘케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도 끝끝내 그런 것 전부를 견디어냈는데 밤의 수색은 그가 목적이 아니었다. 아홉 살의 귀여운 데모원까지 알고 쫓아왔으면서 그는 무시해 버렸다. 무서운 굴욕이었다.
“벌레다, 나는 보지도 말고 밟아 죽여야 하는 더러운 벌레다!”
-<어떤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