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인 사모일로프는 “전쟁, 재앙, 꿈, 청춘”(<40년대>)을 동시에 안고 살아야 했던, 러시아의 비극적인 1940년대 세대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전쟁’의 참상을 전쟁터에서 직접 보고 겪은 그였지만, 시대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 그의 시가 결코 분노나 울부짖음의 격한 감정들로 포화해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재구성하려 하거나 의식적으로 재창조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혹은 있었던 그대로의 자신의 삶을 사색하거나 반추하며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그려 낸다. 이는 시인의 기본적인 창작 방식과도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모일로프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시적 테마는 시인의 과거로, 이런 과거는 ‘기억’을 통해서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 그에게 창작이란 시인의 체험이나 인상들이 일단 시인의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가 그 이후에 재생과 출력을 통해 형상화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인은 시 <40년대>에서 “이 모든 게 내게로 떨어졌고 그 이후에야 내 안에서 깨어났다네!”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한편, 시인은 <기억>에서 기억의 메타포로 새, 바람, 나무, 비, 눈 등을 제시하면서 기억의 힘(“이미지들을 되돌려 주고 늘려 줄 수 있는 그런 숨겨진 힘이 기억 속에는 있다”)에 대해 밝히고 있다.
첫 번째 시집 ≪이웃 나라들≫은 그다지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시인의 창작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기본적 테마와 어조는 이미 이 첫 번째 시집에서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즉 <세묜 안드레이치>, <41년 가을> 같은 시를 통해 ‘전쟁’의 테마를, <유년으로부터>, <서커스>를 통해 ‘유년’의 테마를 ‘기억’의 힘으로 그려 내고 있으며, <차르 이반에 관한 시>를 통해 ‘역사’의 테마를, <겨울 도시>, <눈 엘리베이터>, <겨울날의 시작>, <4월>, <첫 번째 천둥> 등을 통해 ‘자연’의 테마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화를 재해석한 <신데렐라>와 같은 작품 속에서 우리들은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을 눈치챌 수 있고, <하늘의 별들은 오래 전부터…>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숨결’과 ‘온기’로 규정한 시인의 주변 세계와 사물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시집의 이러한 특성들은 두 번째(≪두 번째 고개≫), 세 번째 시집(≪나날들≫)을 거치면서 좀 더 다듬어지고 심화되어 독자들의 의식 속에 ‘사모일로프적인 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례로, ≪두 번째 고개≫에 실린 <40년대>는 시인의 가장 유명한 시(러시아식 표현으로 ‘명함’과도 같은 시)로 여겨질 정도로, 전쟁이 휩쓸고 있던 40년대의 러시아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는 사모일로프 특유의 표현 기법을 통해 훌륭하게 그려지고 있다. 바로 이로 인해 그는 러시아 문단 내에서 ‘전쟁 세대’의 대표자, ‘참전 시인’으로 명실공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사모일로프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러시아에서는 시 장르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1960년대로 이어지는, 이른바 ‘연단의 시’, ‘우렁찬 시’의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로즈데스트벤스키, 옙투셴코, 보즈네센스키와 같은 젊은 세대 시인들은 광장이나 체육관, 대극장 등에서 열정적이며 강한 호소력을 지닌 목소리로 자작시를 낭송해 수백 수천이 넘는 청중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사모일로프의 창작 스타일과 기본 성향은 이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이런 소란스런 분위기에 부담을 느꼈던 사모일로프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모스크바 근교 오팔리하로, 그다음에는 에스토니아 퍄르누로 이동한 뒤 고요한 삶을 영위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앞다투어 모던, 포스트모던을 외치던 시기에도 ‘전통주의자’임을 자처한 그는 18세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던 러시아 시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그 전통의 흐름 속에서 진정성이 녹아 있는 시를 창작했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러시아에서 전쟁 세대의 대표 시인으로 꼽힌 다비트 사모일로프의 시 70편을 엄선해 번역했다. 남들이 앞다투어 모던, 포스트모던을 외치던 시기에도 ‘전통주의자’임을 자처한 그는 18세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던 러시아 시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그 전통의 흐름 속에서 진정성이 녹아 있는 시를 창작했다. 따뜻하고 차분한 그의 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다.
지은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시인이자 산문작가, 번역가인 다비트 사모일로프[본명은 다비트 사무일로비치 카우프만(Давид Самуилович Кауфман)]는 1920년 6월 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본명과 필명을 통해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유태계 혈통으로, 아버지는 유명한 의사였고 어머니는 은행에 근무하는 통·번역가였다. 그의 회상록에 따르면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열네 살 때에는 “시는 나를 위로해 준다. 내가 시를 쓸 때는 모든 나쁜 일들이 떠나가고 편안하고 좋은 것만 남는다고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시에 매료되어 있었다. 1938년, 블라고이, 구지, 우샤코프 등 유명한 인문학자들이 강의를 하고 있었던 모스크바 철학·문학·역사 연구소에 입학해 불문학 전공자가 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코간을 따라 문학연구소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그즈음 국영 예술문학출판사에서 주관하던 일리야 셀빈스키의 시 세미나에 참석했으며, 훗날 소위 ‘전쟁 세대’ 혹은 ‘40년 세대’의 대표자들로 불리게 된 나롭차토프, 슬루츠키 등과 함께 습작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이자 창작 전체의 주요 테마로 자리 잡게 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로 인해 사모일로프의 청춘은 전쟁터에서 흘러갔다. 1943년 3월 전투에서 그는 팔에 중상을 입게 되었고, 회복 후에는 전선으로 되돌아가 정찰병이 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붉은 별 훈장과 메달들을 수여받았다. 생애 첫 시 발표는 셀빈스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는데, 1939년에 쓴 시 <매머드 사냥>이 ‘다비트 카우프만’이라는 본명으로 ≪시월≫지(1941, No. 3)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1958년, 전쟁 시절과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등에 관한 시들로 엮인 첫 번째 시집 ≪이웃 나라들≫을 펴냈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시집 ≪두 번째 고개≫(1963), ≪나날들≫(1970)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고, 이 시집들에 담긴 대조국 전쟁에 관한 훌륭한 시들로 인해 독자들에게 ‘참전 시인’, ‘전쟁 세대의 대표 시인’으로 각인되었다. 그로 인해 시인은 평생 이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다. 1972년에는 이전에 출판된 시집들에 실린 시들 중에서 선별한 시들로 선집 ≪분점≫을 구성해 펴내게 되었고, 1974년에는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푸시킨적인’ 시집이라고 평가받게 된 ≪파도와 바위≫를, 이후에는 ≪소식≫(1978), ≪만≫(1981), ≪언덕 너머 목소리≫(1985), ≪한 줌≫(1989)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 밖에도 ≪신호등≫(1962), ≪아기 코끼리가 공부하러 갔어요≫(1982)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했고, 전문적인 시 이론서인 ≪러시아 압운≫(1973)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사후에는 1962년부터 시인이 써 온 일기를 바탕으로 한 ≪기억할 만한 메모들≫(1995)이 출판되었고, 시인의 유머 감각이 그대로 배어 있는 패러디, 경구들, 서간체 소설들을 담은 ≪제 범위 안에서≫(2001)가 출판되었다.
옮긴이
충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А. 블록의 ‘서정 드라마’: 그로테스크와 서정성의 공존>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 발전상 중요한 문화적 공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러시아문학연구소에서 <오시프 만델시탐의 유기주의 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논문은 동 연구소의 ‘푸시킨스키 돔’ 출판사를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Органическая поэтика Осипа Мандельштама≫(СПб., 2008)]. 2012년 현재 서울대와 충북대 등에서 러시아 문학과 문화, 러시아어를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만델시탐의 유기주의적 언어관>, <만델시탐의 8행시들(1932∼1934)에 나타난 ‘창작’ 테마>, <사모일로프 창작에 있어서의 ‘기억’의 문제> 등이 있다.
차례
매머드 사냥 3
뮤즈 6
세묜 안드레이치 7
하늘의 별들은 오래전부터… 12
겨울 도시… 14
41년 가을 15
눈 엘리베이터 18
동화 20
유년으로부터 22
바람이 분다 23
신데렐라 25
난 한밤에 오르딘카로 나갔다… 28
마흔. 삶은 두 번째 고개로 넘어갔다… 30
소박하고 메마른 시구… 32
볼디노의 가을 33
40년대 35
다행이야! 다행!… 37
우리들의 날짜를 하나씩 세어 보며 39
슈베르트 프란츠 41
말 43
영감(靈感) 45
저택-박물관 47
노인장 데르자빈 51
너랑 같이 갔었던 도시로 가자… 54
난 점차 시인이 되어 가고 있다… 57
햄릿의 무죄 석방 58
눈 내리기 전 61
기억 63
겨울의 이름들 65
페스텔, 시인 그리고 안나 67
내 유년의 뜰 74
시인의 죽음 76
외출 82
이게 다다. 천재들이 눈을 감아 버렸다… 84
시를 고생 끝에 얻게 하소서!… 85
나 끔찍한 꿈을 꾸었지… 86
정말 평생을 괴로워해야 하는구나!… 88
꿈을 꾸었어. 이 힘겨운 꿈속에서… 89
미하일롭스코예 91
이제는 나 이미 알게 되었지… 93
안개, 안개, 안개… 94
밤 손님 95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토바는… 101
자유시 102
뇌우가 그쳤다… 107
자신을 모두 태워 버리고… 108
초고들 109
그런데 말은 복수의 무기가 아니다!… 111
시가 떨어져 있게 하라… 112
그리고 바로 어느 날 밤… 113
자유시 115
사랑하며 난 행복했었던가?… 117
다리 119
아르세니 타르콥스키에게 120
나무들이 숲이 되려면… 122
난 이미 세 번째 고개 너머에 있다… 123
러시아의 시인이 되는 행운이 내게 떨어졌다… 125
이 시각 한 명의 천재가 시를 쓰려 앉는다네… 126
시는 기이해야 하고… 127
경기병의 노래 128
난 어디서 왔을까?… 130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푸시킨 133
겨울 모기 137
EXEGI… 139
초고 143
재빠른 말들과 찰나적인 인상은 죽지 않고… 146
네가 모든 걸 다 가져갈 수는 없지… 147
그 무엇도 시를 방해할 순 없다… 148
시는 재미가 없어!… 149
다섯 통의 편지를 다 쓰고 난 뒤… 151
해설 153
지은이에 대해 162
옮긴이에 대해 167
책속으로
바들거리던 작은 별 하나가
둥지에서 나온 어린 새처럼 우리 발 아래로 날아든다.
그 별을 우리들은 손으로 가져간다. 그 위에 서서,
우리들의 숨결로 데우고 또 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