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행동하는 양심’이 구국 항일 전선에 뛰어든 이육사에게 걸맞은 말이라면(김학동, ≪이육사 평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부끄러움’은 필력으로 문학과 영화 예술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자 했던 심훈에게 걸맞은 말일 것이다.
친일 문학 문제가 또다시 한창 불거졌던 1998년 H대학에서 모 시인의 문학 강연이 있었다. 시인은 강연의 시작부터 본인의 친일 문제를 거론하면서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거듭하면서 강연을 끝마쳤다. 시인이 ‘당시 어쩔 수 없었으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 말은 일제 식민지 시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본인이 느낀 수치요 부끄러움에 대한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일 것이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많은 문학인들은 친일 문학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던 민족의 저항 시인 심훈도 당시의 행동에 대해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그런데 심훈은 친일 문학을 했던 문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친일 때문이 아니라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 구국 항일 전선에 직접 참가하지 못한 실천 행동, 실행의 부족에 대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졌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투쟁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현실적 한계로 자책하며 울분을 삼켰다. 하지만 그의 울분은 소설로 영화로 그리고 시로 옮겨졌다. 그는 항일 투쟁에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행동하는 양심’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했던 시인이었다. 한때 심훈과 함께 자취했던 아동문학가 윤석중은 “그의 기자 시절을 한마디로 말하면, ‘술에 취한 나날’이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회고처럼 심훈은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향한 열망과 조국 해방을 향한 실천적 행동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에 암담한 현실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며,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현실을 직시하면서 문학이라는 매개로 민족의 계몽과 각성을 통해 민족의 자주 독립을 염원했던 저항 시인이었다.
심훈이 생전에 출간하고자 했던 ≪심훈 시가집≫ ‘검열본’은 “서시, 제1부 봄의 서곡, 제2부 통곡 속에서, 제3부 짝 잃은 기러기, 제4부 거국(去國)편, 제5부 항주유기(杭州遊記)”로 구성되어 있다. 심훈의 생애를 참조해 이 목차를 재구성하면 “제2부 통곡 속에서”가 가장 먼저 나오고 “제4부 거국(去國)편”과 “제5부 항주유기(杭州遊記)”가 이어서 나온 다음, “제3부 짝 잃은 기러기”로 이어진 이후 “제1부 봄의 서곡”이 노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주의적인 관점에서 심훈의 생애를 통시적으로 살펴볼 때 1919년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심훈은 경성 헌병대에 체포되어 투옥된 후 6개월여 간의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난다. 그는 국권을 찾고자 시도한 기미년 3·1만세 운동의 ‘통곡 속에’ 있었다. 또한 그는 형무소에서 독립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끝내 목숨마저 잃는 독립투사들의 ‘통곡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했다. 그 통곡 속에서 ‘철천(徹天)의 한(恨)’을 품고 그는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망국인의 애처로운 통곡은 거기서도 여전히 이어지며, ‘유랑민의 신세’이자 ‘부유(蜉蝣: 하루살이)’와도 같은 삶과 낭만적이고 소요(逍遙)하는 삶이 교차하던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그는 즈장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돌연 국내로 들어와 신문 기자 활동을 한다. 심훈은 일제 식민지라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기보다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동포의 비극적 현실 상황에 분(憤)해 하며, 울분을 토한다. 그는 조국의 현실, 동포의 비극적 상황을 짝을 잃은 기러기로 비유한다. 일본 제국주의 앞에 가엾고 불쌍한 형국을 맞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그는 외로움·고독·설움의 애달픔으로 짓눌린 울분을 토하면서도 “절망을 모르고 끝까지 조금도 비관하지”(<R 씨의 초상>) 않는다. 더욱이 그가 ‘이놈의 현실에 치를 떨면서도 전신의 힘을 다해 한 획(劃)’(<곡 서해>, <R 씨의 초상>)이라도 긋고자 하는 것은 봄이다. 심훈에게 봄은 꿈이자 소망이며, 소생이자 해방이다. 반면에 겨울은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와 억압의 시간이며, 식민지인의 암울한 현실이자 고통과 번민, 좌절과 통곡의 시간이다. 심훈은 겨울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며, 봄을 맞이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렇기에 심훈은 국권을 빼앗긴 일제 식민지 상황을 계절적 시기로는 겨울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시간적으로는 어두운 밤으로 인식했다. 그가 출판하고자 했던 ≪심훈 시가집≫ 검열본의 서시는 <밤>이다.
심훈 시의 전개 과정은 점진적인 깨달음의 과정을 밟아 전진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그의 시는 고뇌와 좌절, 고통과 비탄, 울분과 설움으로 점철된 현실 인식이 자기희생의 소멸 과정을 밟아 소생과 생명, 해방과 기쁨, 희망과 미래를 지향하는 그날로 나아간 것이다. 이처럼 심훈의 시는 1930년대 이육사의 시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우리 시의 저항적 문학 세계의 지평을 열어 나갔다.
200자평
“그날이 오면”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 그 자리에 꺽구러저도 눈을 감겠다던 심훈. 문학과 영화 예술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자책하는 그의 시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지은이
심훈(沈熏, 1901∼1936)은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노량진리에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본명은 ‘대섭(大燮)’이다. 어렸을 때 ‘삼준(三俊)’, ‘삼보(三保)’로도 불렸으며, 필명으로 ‘금강샘’, ‘백랑생(白浪生)’, ‘해풍(海風)’ 등을 썼고, 1926년 이후부터 아호로 ‘훈(熏)’을 썼다.
1915년 심훈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2년 뒤인 1917년 3월에는 왕족의 누이동생 이해영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해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재학 중 조선인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한 일본인 수학 선생에게 항의하며, 그 항의의 표시로 백지 답안을 제출해 수학 과목이 낙제되어 유급을 당한다.
1919년 3월 기미년 만세 사건 때 심훈은 남대문 앞에서 가담하며, 3월 5일 경성 헌병대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7월 형 집행을 마치고 풀려나지만 퇴학을 당한다. 심훈은 당시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2005년 7월 경기고등학교는 심훈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1920년 심훈은 흑석동 본가와 가회동 큰형 집에 머물면서 문학 독서에 매진하며,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듬해 1921년 그는 중국 항저우의 즈장대학(之江大學) 문학원에 입학해 극문학 관련 공부를 하다가 1923년 국내에 들어와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등과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며,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 활동도 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송영, 이적효, 이호, 박세영, 김홍파 등이 주축이 된 사회주의 문화 단체인 ‘염군사’ 멤버로 동참하며, 1925년에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도 가담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무산 계급의 해방 문학보다는 전방위적인 해방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2월 심훈은 동아일보 학예부에서 사회부로 옮긴 후 ‘철필구락부’에 가입하며, ‘철필구락부 사건(급료 인상 투쟁 사건)’으로 해직된다. 그해 11월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 소설 <탈춤>부터 “심훈(沈熏)”이란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1927년 2월에는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일(渡日)하며 일본의 닛카스(日活) 회사에 입사하지만 얼마 있지 않고 5월 귀국해 경성방송국 프로듀서로 입사한다. 그러나 일본 황태자를 전하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3개월도 안 되어 퇴사를 당한다. 그리고 7월에는 나운규를 감독으로 <탈춤>을 영화화하며, 10월에는 원작·각색·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원제 <어둠에서 어둠까지>)를 완성해 상영하기도 한다.
1928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신문 기자직을 이어 가나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 생계를 외상으로 허덕인다. 이 해 11월 ≪새벗≫에 소년 영화 소설 <기남(奇男)의 모험(冒險)>을 게재한다. 1929년에는 ≪조선일보≫에 소설 <오월비상(五月飛霜)>을 게재하며, <원단잡음(元旦雜吟)>, <거리의 봄>, <어린이날>, <야구(野球)> 등의 시도 여러 편 게재한다.
1930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하나 10월 29일 조선총독부 검열로 중단된다. 그리고 그 해 11월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한 안정옥(安貞玉)과 약혼하며, 12월 24일에는 결혼을 한다.
1931년 8월 16일부터는 ≪조선일보≫에 <불사조>를 연재하나 12월에 또다시 검열로 중단된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 기자직을 그만두고 양친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살게 되며, 그해 4월 아들 ‘재건’이 태어난다. 이해 9월 경성세광사에서 ≪심훈 시가집≫을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출간이 미뤄진다.
1933년 7월 심훈은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영원한 미소≫를 연재하며, 8월에는 기자 생활을 못 잊어 서울로 상경해 조선중앙일보사에 들어가 학예부장을 맡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당진으로 다시 내려간다. 그는 1934년 3월 이혼한 부인 이(李)씨를 모델로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며, 여기서 생긴 원고료로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그 집에서 ≪상록수≫를 완성한다.
1935년 2월 심훈의 장편소설 ≪영원한 미소≫가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며, 8월에는 ≪동아일보≫ 창간 15돌 기념 현상공모에 ≪상록수≫가 당선된다. 심훈은 그때 받은 상금 500원 중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하며, 이 후원으로 상록학원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상록수≫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1936년 8월 10일 심훈은 서울로 상경했다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접하고는 신문 호외의 뒷면에 시 <절필-오오 조선의 남아(男兒)여!>를 써서 ≪중앙≫ 문예지 편집실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상록수≫ 출판 문제를 의논하고 ≪심훈 시가집≫ 교정을 보던 중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대학병원에서 치료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17일에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사후 1949년 7월 생전에 출간하지 못한 그의 시가집이 중형(仲兄) 심설송(沈雪松)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으로 발간된다.
엮은이
최도식은 1972년 6월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태어났으며, 도계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 공부를 한다.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이승훈 선생으로부터 시창작론 수업을 듣고 창작의 어려움을 실감한다. 1999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2002년 서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다. 서강대학교에서는 김학동 선생으로부터 역사주의 연구와 서지학적 관점에서의 시인론(詩人論)을 배우게 되며, 박철희 선생으로부터 구조주의 문학 이론과 비평 이론들을 배우며, 김승희 선생으로부터는 라캉의 정신 분석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 이론을 배우게 된다.
연구의 길에 입문해 초기 구상(具常)의 시에 관심을 갖고 <구상 시의 탈구조주의적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연작시에 관심을 갖고 <한국 현대 연작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지역 문학에도 관심을 갖고 충북 지역과 강원 영동 지역의 문인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전후 문제시인 연구≫(공저), ≪이상필 문학집≫ 등의 연구서와 편저가 있다. 논문으로는 <<초토의 시>의 개작 양상 연구>, <구상 시의 자연관과 생태 인식 연구>, <‘사모(思母)’ 시에 나타난 어머니와 시적 주체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 <이상과 로버트 덩컨의 연작시 비교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 교양학부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며 문학 연구에 붉은 정성을 쏟고 있다.
차례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序詩
봄의 序曲
봄의 序曲
피리
봄비
咏春 三 首
거리의 봄
나의 江山이어
어린이날
그날이 오면
도라가지이다
筆耕
明沙十里
海棠花
松濤園
叢石亭
痛哭 속에서
生命의 한 토막
너에게 무엇을 주랴
朴 君의 얼골
조선은 술을 먹인다
獨白
朝鮮의 姊妹여
짝 잃은 기러기
孤獨
漢江의 달밤
풀밭에 누어서
嘉俳節
내 故鄕
秋夜長
小夜樂
첫눈
눈 밤
浿城의 佳人
冬雨
선생님 생각
太陽의 臨終
狂瀾의 꿈
마음의 烙印
토막 생각
어린것에게
R 氏의 肖像
輓歌
哭 曙海
잘 잇거라 나의 서울이어
玄海灘
武藏野에서
北京의 乞人
鼓樓의 三更
深夜過黃河
上海의 밤
杭州遊記
平湖秋月
三潭印月
採蓮曲
蘇堤春曉
南屛晩鐘
樓外樓
放鶴亭
杏花村
岳王墳
高麗寺
杭城의 밤
錢塘 江畔에서
牧童
七絃琴
錢塘 江上에서
겨울밤에 내리는 비
汽笛
뻐꾹새가 운다
絶筆
새벽빛
나의 가장 친한 兪亨植 君을 보고
農村의 봄
近吟 三 首
元旦雜吟
비 오는 밤
‘웅’의 무덤에서
野球
젊은이여
가을
三行日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작품 연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 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前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 같이
鍾路의 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저 散散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딍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듯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꺽구러저도 눈을 감겠소이다.
●痛哭 속에서
큰길에 넘치는 白衣의 물결 속에서 울음소리 닐어난다.
銃劍이 번득이고 軍兵의 말굽 소리 騷亂한 곳에
憤激한 무리는 몰리며 짓밟히며
에 업듸어 마즈막 悲鳴을 지른다
을 드리며 한울을 우럴어
외오치는 소리 늣겨 우는 소리 九霄에 사모친다!
검은 ‘당긔’ 들인 少女여
눈송이가티 素服 닙은 少年이어
그 무엇이 너의의 작은 가슴을
안타게도 설음에 게 하드냐
그 뉘라서 저다지도 거운 눈물을
어여 너의의 두눈으로 아내라 하드냐?
가지마다 新綠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종달새 시내를 흐는 질거운 봄날에
어하야 너의는 벌서 깃븜의 놀애를 이저버렷는가?
天眞한 너의의 幸福마저 참아 어 사람이 앗어 가든가?
한아버지여! 한머니여!
오즉 무덤 속의 安息밧게 希望이 친 老人네여!
조밥에 줄음 잡힌 얼굴은 누르럿고 世苦에 등은 굽엇거늘
膓子를 쥐어며 哀痛하시는 양은 참아 뵙기 어렵소이다.
그치시지요 그만 눈물을 거두시지오.
당신네의 衰殘한 白骨이나마 便安히 무치고자 하든 이 땅은
남의 ‘호미’가 삿삿이 파헤친 지 이미 오래어늘
지금에 피나개 우신들 한번 간 녯날이 다시 돌아올 줄 아십니?
해마다 봄마다 새 主人은
仁政殿 ‘사구라’ 그늘에 잔치를 베풀고,
梨花의 徽章은 낡은 수레에 부터
틔만 날리는 廢墟를 굴러다녀도
日後란 뉘 잇서 길이 설어나 하랴마는…
오오 겨 가는 무리여
쓸어저 버린 한낫 偶像 압헤 무릅을 치 말라!
덧업는 人生 죽고야 마는 것이 우리의 宿命이어니
한 사람의 돌아오지 못함을 구지 설어하지 말라.
그러나 오오 그러나
徹天의 恨을 품은 靑孀의 설음이로되
이웃집 祭壇조차 문허저 하소연할 곳 업스니
목매처 울고자 하나 눈물마저 말라부튼
抑塞한 가슴을 이 한날에 드리며 울자!
이마로 흙을 부비며 눈으로 피를 으며-
●獨白
사랑하는 벗이여,
슲은 빛 감추기란 매 맞기보다도 어렵소이다.
온갓 설음을 꿀꺽꿀걱 참어 넘기고
낮에는 히히 허허 실없은 체하것만
쥐죽은 듯한 깊은 밤은 사나이의 통곡장(慟哭場)이외다.
사랑하는 벗이어,
憤한 일 참기란 생목숨 끊기보다도 힘드오이다.
癪덩이처럼 치밀어 오로는 가슴의 불길을
噴火口와 같이 한울로 뿜어내지도 못하고
靑春의 염통을 ‘알콜’에나 젓으려는
이놈의 등어리에 채쭉이라도 얹어 주소서.
사랑하는 그대여,
祖上에게 그저 받은 뼈와 살이어늘
남은 것이라고는 벌거벗은 알몸뿐이어늘
그것이 아까워 놈들 앞에 절하고 무릎을 꿇는
나는 ‘샤롴’보다도 더 吝嗇한 놈이외다.
쌀 삶은 것 먹을 줄 아니 그 일홈이 사람이외다.
●어린것에게
고요한 밤, 너의 자는 얼골을 무심코 드려다볼 때,
새근새근 쉬는 네 숨소리에 귀를 기우릴 때,
아비의 마음은 海綿처럼 사랑에 붓[潤]는다.
사랑에 겨워 고사리 같은 네 손을 가만히 쥐어도 본다.
이 손으로 너는 장차 무엇을 하려느냐
네가 씩씩하게 자라나면 무슨 일을 하려느냐
붓대는 잡지 마라, 행여 붓대만은 잡지 말어라
죽기 전 아비의 유언이다, 호미를 쥐어라! 쇠마치를 잡어라!
실눈을 뜨고 엄마의 젓가슴에 달러붙어서
배내짓으로 젓 빠는 흉내를 내는 너의 얼골은
평화의 보드라운 날개가 고히고히 쓰다듬고,
잠의 神은 네 눈에 들락날락하는구나.
내가 너를 왜 낳어 놓앗는지 나도 모른다.
네가 이 알뜰한 세상에 왜 태어낳는지 너도 모르리라.
그러나 네가 땅에 떨어지자 으아! 소리를 우렁차게 질를 때
나는 들엇다, 그 뜻을 알엇다. 억세인 삶의 소리인 것을!
…以下 十二 行 畧…
조선 사람의 피를 百代나 千代나 이어 줄 너이길레
팔다리를 자근자근 깨물고 싶도록 네가 귀엽다.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고야 말 우리 집의 업둥이길래
남달리 네가 귀엽다. 꼴닥 삼키고 싶도록 네가 귀여운 것이다.
모든 무거운 짐을 요 어린것의 억개에만 지울 것이랴
온갖 희망을 염체 네게다만 붙이고야 엇지 살겟느냐
그러나 너와 같은 앞날의 일꾼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우리의 뿌리가 열 길 스므 길이나 박혀 잇구나.
그믐밤에 반디ㅅ불처럼, 저 한울의 별들처럼
반득여라, 빛나거라, 가는 곧마다 홰ㅅ불을 들어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어서어서 저 주먹에 힘이 아라.
오오 우리의 강산은 왼통 꽃밭이 아니냐? 별투성이가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