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야기 주키치의 시는 대부분 짧고 간결하다. 그리고 쉽다. 그러나 쉽다고 안이하게 접근하다가는 여백 속에 숨어 있는 생략된 시어를 놓치기 십상이다. 시어와 시어 사이를, 행과 행 사이를 옮겨 갈 때는 부드러운 멈춤과 긴 호흡이 필요하다. 그래야 여백 속에 숨어 있는 시어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사무치는 고독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 자신의 내면을 그린 시는 물론 그리스도와 가족, 그리고 주위 풍경을 노래한 시에도 짙은 고독이 스며 있다. 그러나 그의 고독한 시어들 속에는 순수함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다카무라 고타로는 야기 주키치의 시를 “그의 시는 불후의 시다. 마음의 물방울 같은 시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시인의 마음속 깊이의 중핵만을 골라 노래했다”고 평했으며, 구사노 신페이는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평범한 독백이다. 그런데도 마음을 울린다”고 했다.
주키치의 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여러 편 실렸다. 또한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꽤 많은 시가 작곡되었고 이로 인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시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 속에서 고뇌하는 시, 신앙과 시작(詩作)의 갈등을 표현한 시, 꽃, 나무, 풀 등 자연을 관조하며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노래한 시들이다. 아내와 딸 모모코, 아들 요지가 등장하는 시도 많아 가족에 대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봄, 가을 등 계절을 나타내는 똑같은 제목의 시가 많다.
야기 주키치라고 하면 기독교 시인으로 대부분 신앙시를 연상하는 독자가 많다. 이는 그의 사후 출판한 유작들이 대부분 ‘종교 시인 야기 주키치’라는 측면에서 그를 소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을의 눈동자≫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나 ‘신’이나 ‘신앙’이라는 말을 쓴 시는 거의 없다. 그를 기독교 신앙시를 쓴 시인으로만 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이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평가하는 게 타당하다는 견해가 많다. 역자도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한다. 이 책을 통해 야기 주키치의 작품이 종교에 편향되지 않고 보다 폭넓은 독자들에게 다가가길 기대해 본다. 그의 시어들은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야기 주키치 전집≫[지쿠마쇼보(筑摩書房), 1983]에 수록된 시집 ≪가을의 눈동자≫[신초샤(新潮社), 1925]와 ≪가난한 신도≫[노기쿠샤(野菊社), 1928]에서 발췌해 엮었다. ≪가을의 눈동자≫는 야기 주키치가 27세 때 출판한 첫 시집으로 117편의 시가 실려 있다. ≪가난한 신도≫는 폐결핵으로 병상에 있던 그가 직접 시를 선별해 두었으나 출판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그의 사후에 간행된 둘째 시집으로 103편의 시가 실려 있다.
200자평
미야자와 겐지와 함께 일본 근대시를 개척한 시인이다.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그의 시에는 현란한 수식도, 난해한 상징도 없다. 평범하고 쉬운 시어로 간결한 시행을 이룬다. 그 소박하고 순수한 여백 안에 인간이 담기고 우주가 비친다. 일본 초중등 국어교과서에 그의 시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지은이
야기 주키치(八木重吉, 1898∼1927)는 현재의 도쿄 도(東京都) 마치다 시(町田市) 아이하라 정(相原町)에서 농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 고향을 떠나 가마쿠라의 가나가와 현 사범학교 예과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진학한다. 이곳에서의 4년간은 그의 인격 형성에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재학 중 기독교 세례를 받지만, 우치무라 간조의 저서를 읽고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23세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효고 현 미카게(御影)사범학교의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그다음 해에 영어를 가르치면서 알게 된 도미와 결혼해 미카게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열중한 주키치는 자신이 쓴 시를 모아 아내와 같이 직접 손으로 많은 소시집을 만들었다. 결혼한 다음 해에 딸 모모코가, 2년 후에 아들 요지가 태어난다. 그 후 27세 때 지바 현 가시와(柏)에 있는 히가시카사이(東葛飾)중학교로 옮기게 되는데 그는 그때까지 쓴 시를 골라 첫 시집 ≪가을의 눈동자≫를 출판하고 이후 시 잡지 등에 시를 발표한다. 그러나 가시와로 옮긴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폐결핵이 발병해 입원하게 된다. 병상 생활을 하면서 둘째 시집 ≪가난한 신도≫에 실을 시를 고르지만 간행을 보지 못하고 1년이 넘는 투병 생활 끝에 아내와 어린 두 아이를 남기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병상 노트에는 모모코와 요지를 보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정과 자신이 두 아이의 아버지인 것이 다른 누구의 아버지인 것보다 훨씬 기뻤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모모코와 요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반드시 한집에서 키워 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하는 내용도 있다.
둘째 시집 ≪가난한 신도≫는 그가 세상을 떠난 4개월 후 간행되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그의 아내는 도쿄로 옮겨 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된 일을 하면서 두 아이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지만 주키치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에 딸 모모코가, 그리고 13년 후에는 아들 요지가 같은 병명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주키치가 남긴 시들이 유실되지 않고 사후에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고통 속에서도 시들을 소중히 간직해서 시집을 출판하겠다는 도미의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기 주키치의 대표작으로는 ≪가을의 눈동자≫, ≪가난한 신도≫, ≪신을 부르다≫, ≪꽃과 하늘과 기도≫, ≪야기 주키치 전집≫ 등이 있다.
옮긴이
이영화는 일본 조사이 국제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 박사 과정(비교문화학 박사)과 일본 쓰쿠바 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과학 연구과 박사 과정(문학박사)을 수료했다.
조사이 국제대학 한국 문화 연구 센터 연구원을 거쳐 지금은 조사이 국제대학과 동 대학원 인문과학 연구과에서 한국어, 한국 문화, 번역 등 주로 한국과 관련된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관심 분야는 원폭 문학, 엔도 슈사쿠 문학과 기독교, 기독교 문학과 교회 밖의 신앙, 한국어 교육 등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인, 의, 예, 지를 실천하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려 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遠藤周作の文学とキリスト教−インカルチュレーションと預言者性(엔도 슈사쿠 문학과 기독교−Inculturation과 예언자성)>, <インカルチュレーションと遠藤周作の文学−神学と文学の相互作用(Inculturation과 엔도 슈사쿠의 문학−신학과 문학의 상호작용>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韓国語ゴーゴー≫(白水社, 2012. 3, 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유미리(柳美里)의 ≪평양의 여름 휴가−내가 본 북조선(ピョンヤンの夏休み−私が見た北朝鮮)≫(도서출판615, 2012), 구리하라 사다코(栗原貞子)의 ≪히로시마라고 말할 때(ヒロシマというとき)≫(지식을만드는지식, 2016)가 있다.
차례
≪가을의 눈동자≫
서문
숨을 죽여라
하얀 가지
슬픔의 불화살
쾌청한 날
넓은 하늘의 마음
정원사
고향의 산
조용한 화가
아름다운 것
꽃이 되고 싶다
꾸미지 않은 구름
검을 지닌 자
항아리 같은 날
지친 마음
슬픔
아름다운 꿈
마음이여
죽음과 아름다운 것
울려 퍼지는 영혼
하늘을 가리키는 우듬지
갓난아기가 웃는다
꽃이 되어 피어라
장독
마음이여
아름다운 보석
관통하는 빛
용설란
긍지 있는 풍경
추억
구름
어느 날의 마음
어린 날
왜 색깔이 있는 걸까
무거운 슬픔
안개가 내린다
하늘이 쳐다보고 있다
마음이 어두운 날
밤의 장미
우리 아이
해치는 기도
조용한 불꽃
돌덩이와 말하다
번개
조릿대
공허함의 하늘
마음의 출항
아침의 위태로움
비 오는 날
추억
풀씨
암광
멈춘 회중시계
비둘기가 난다
풀에 앉다
밤하늘의 해파리
무지개
가을
여명
이상하게 여기다
파란 물그림자
인간
노한 모습
어렴풋한 이미지
가을날의 마음
흰 구름
흰 길
감상(感傷)
늪과 바람
가을 벽
우주의 양심
조용한 흐름
작은 포대기
울지 마라 아이야
분노
봄
버들도 가볍고
≪가난한 신도≫
어머니의 눈동자
달맞이
꽃이 내려올 것 같다
눈물
가을
빛
어머니를 생각하다
바람이 인다
아이가 아프다
울리며 가자
아름답게 버린다
아름답게 본다
길
황매화
어느 날
미움
밤
해가 진다
과일
벽
빨간 잠옷
기적
나
꽃
겨울
신기함
인형
아름답게 걷다
슬픔
풀을 뽑다
어린아이
비 오는 날
개미
산잠자리
벌레
나팔꽃
싸리
수박을 먹자
봄
봄
봄
매화
겨울밤
병
태양
돌
봄
봄
봄
벚나무
신의 길
겨울
겨울 햇살
숲
저녁노을
서리
겨울
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싶다
비
거무스름한 나무
장지문
오동나무
나무
춤
도깨비
소박한 고토(琴)
울림
안개
고향
아이
돼지
개
감잎
눈물
구름
동전
물과 풀은 좋은 것들이다
하늘[天]
가을빛
달
슬픔
고향의 강
고향의 산
얼굴
저녁노을
겨울밤
화창한 날
겨울
겨울 들녘
병상 무제
무제
무제
무제
매화
비
찬 바람
무제
무제
무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풀에 앉다
내 잘못이었다
나의 잘못이었다
이렇게 풀에 앉으면 그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