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당시(唐詩)는 중국 고전 문학 최고의 정화로, 후세 사람들에게 불후의 고전적 자양을 제공하고 있다. 시불(詩佛) 왕유(王維)는 시선(詩仙) 이백(李白)·시성(詩聖) 두보(杜甫)와 함께 당시의 3대 거장으로 꼽히면서도, 이(李)·두(杜)와는 상이한 시풍으로 그 특유의 매력을 발한다.
초년의 왕유는 적극 진취적인 유가 사상의 소유자였으나 정치적인 실의에 빠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에는 불가와 도가적인 경향을 아울러 보이다가 점차 오직 불교에만 극도로 심취했는데, 이 같은 인생 사상이 그의 창작 정신의 원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백과 두보가 각각 낭만시와 사회시 창작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면, 왕유가 당나라 시단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보적인 면모를 보인 것은 바로 자연시의 창작으로, 그는 동진(東晋)의 도연명(陶淵明) 이후 최고의 자연시인으로 평가된다. 송(宋)나라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시중유화(詩中有畫)’·‘화중유시(畫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로, 산수수묵화의 대가이기도 했던 왕유 시(詩)·화(畫)의 예술적 경지를 압축 평가함으로써 후세의 절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유의 자연시는 역관역은(亦官亦隱: 몸은 벼슬하고 있으나 마음은 늘 피세 은둔의 정취를 동경 추구하며, 또한 때로 기회가 되면 한시적으로나마 실제로 산수 전원에 은거하는 삶)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졌으며, 대부분이 은거 생활과 불도(佛道) 사상이 결합된 산물로, 시인의 피세 은둔의 초탈 정신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세속적인 욕망은 일찌감치 떨쳐 버리고 오직 한가롭고 편안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성정(性情)이 시작 속에서 여실히 표현되고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전원 경물이나 산수 풍광의 묘사 가운데서 절로 풍겨 나는 은둔적 정취다. 이를테면 ≪망천집(輞川集)≫ 중의 <죽리관(竹籬館)>은 그윽한 대숲 속의 탈속적인 정취를 묘사하고 있으니, 세상과 동떨어져 고적(孤寂)함이 감도는 깊은 대숲에서 거문고도 타고 휘파람도 불며, 살며시 다가와 비춰 주는 밝은 달빛과 ‘지음(知音)’의 벗인 양 하나 되어 탈속적인 정취를 즐기는 시인은,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든 듯하다. <산장의 가을 저녁녘(山居秋暝)>은 저녁녘에 한 차례 비가 온 뒤 그윽하고 고아한 산중의 경물을 묘사했는데, 시정(詩情)과 화의(畫意)가 넘치는 가운데 시인의 고결한 품성과 초탈적 정서가 새롭다. <날씨 갠 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新晴野望)> 역시 비가 막 갠 후 아득한 들판에 펼쳐진 초여름의 전원 경색(景色)과 농경 생활을 묘사했는데, 전편에 걸쳐 강조되고 있는 소박하고 평화로우면서도 활력 넘치는 전원의 생활과 정취는, 세속적인 번뇌에서 벗어난 자적(自適)한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 있다.
200자평
이백을 시의 신선이라 하고 두보를 시의 성인이라 할 때 시의 부처로 불리는 것이 왕유다. 몸은 관직에 있으나 마음은 자연에 두었다. 시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다시 시를 썼다. 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길이 되었으니 부처가 아닐 수 없다.
지은이
왕유(王維, 701∼761)는 자(字)가 마힐(摩詰)이고, 당나라 하동[河東: 지금의 산시성(山西省)]의 하급 관료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재다능했다.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왕유는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이미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여러 동생들과 함께 가난하게 자랐다. 특히 독실한 불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접하게 된 불교 사상은, 그의 삶과 문예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왕유는 대략 열다섯 살 때 동생 왕진(王縉)과 함께 고향을 떠나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양경(兩京)을 오가며 사회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는데, 출중한 문예 재능에 힘입어 귀족 사회의 호감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개원(開元) 9년(721) 21세에 진사가 되어 궁중의 음악을 관장하는 태악승(太樂丞)에 올랐으나, 같은 해 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사창참군(濟州司倉參軍)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왕유는 제주에서의 임기를 마친 얼마 후, 다시 기수(淇水) 일대에서 벼슬하다가 오래지 않아 사직하고 현지에서 은거했으며, 개원 17년쯤 장안으로 돌아와 한거(閑居)하던 중 31세경에 부인과 사별하고 평생을 홀로 살았다. 개원 22년에는 낙양 부근 숭산(嵩山)에서 은거했고, 이듬해 봄 마침내 현상(賢相) 장구령(張九齡)의 천거로 우습유(右拾遺)에 등용되면서, 좌천의 실의(失意)와 상처(喪妻)의 고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정치적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개원 24년 겨울 장구령이 시기와 모함 속에 파직당하고, 간상(奸相) 이임보(李林甫)가 그 자리에 오르고 말았다.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장구령의 실각은, 왕유에게서 일말의 정치적 열정과 이상마저 빼앗아 가 버렸다. 뜻하지 않은 소용돌이의 충격으로 의기소침해진 왕유는, 이듬해 양주(涼州)로 출사(出使)해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의 막부(幕府)에서 판관(判官)을 겸임하게 되는데, 변방의 풍광과 호정(豪情) 앞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실의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개원 26년 장안으로 돌아와 동(同) 28년에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올랐고, 같은 해 겨울에는 영남(嶺南)으로 출사해 남방의 지방관 선발 시험을 주재했다. 이듬해 장안으로 돌아온 왕유는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다가 다시 그 이듬해, 즉 천보(天寶) 원년(742)에는 좌보궐(左補闕)에 올랐다. 이후 안사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줄곧 장안에서 벼슬살이를 했지만, 이임보와 양국충(楊國忠)이 온갖 전횡을 일삼는 정치 암흑 상황에서 ‘역관역은’의 삶을 살며 종남산 망천(輞川) 계곡에 별장을 마련해 놓고, 틈나는 대로 직접 그곳을 찾아 산수의 정취에 젖으며 한가로이 지내곤 했다.
천보 1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 왕유는 촉(蜀)으로 피난하는 현종(玄宗)을 따라가지 못하고, 반군에게 잡혀 보리사(菩提寺)에 갇히는 등 우여곡절 끝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벼슬을 떠맡게 되는데, 이 실절(失節)로 그는 죽는 날까지 줄곧 치욕과 참회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지덕(至德) 2년(757) 조정에서 양경(兩京)을 탈환한 후, 반군에게 억류당해 그들의 벼슬을 했던 사람을 벌할 때, 왕유는 숙종(肅宗)이 그의 내심의 충정을 인정해 특사를 내림으로써 화를 면했다. 이후 그의 여생은 오직 자책과 보은의 나날이었으며, 상서우승(尙書右丞) 벼슬자리에서 세상을 떠나니, 후세에 그를 ‘왕 우승(王右丞)’이라 부르게 되었다.
옮긴이
박삼수(朴三洙)는 경북 예천 태생으로 경북대학교, 중국 타이완(臺灣)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각각 중문학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찍이 미국 메릴랜드대학 동아시아언어학과 방문교수를 거쳤다. 현재 울산대학교 중문학과 교수로 있으며 출판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는 ≪왕유 시전집≫, ≪주역≫(이상 현암사), ≪왕유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쉽고 바르게 읽는 논어≫(지혜의바다), ≪논어 읽기≫(세창미디어), ≪바르게 읽는 논어 1≫, ≪고문진보의 이해와 감상≫, ≪당시의 거장 왕유의 시 세계≫, ≪맹자의 왕도주의≫(이상 UUP), ≪시불 왕유의 시≫(세계사), ≪사기(史記)≫(공역, 까치),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공저, 휴머니스트) 등이 있다.
차례
편년시(編年詩)
진시황릉을 찾아서
9월 9일 고향의 형제들을 그리며
도원행
식 부인
하북성 성루(城樓)에 올라서
정주에서 묵으며
이별
기수(淇水) 가의 전원 풍경
서늘맞이
숭산으로 돌아가며
변각사에 올라서
종남산 별장
종남산
백원와
반 첩여
노상(盧象)과 함께 최흥종(崔興宗)의 숲 속 정각(亭閣)을 찾아서
콩새
서시(西施)
늦은 봄날 규중(閨中)의 상념(想念)
산속으로 돌아가는 친구를 송별하며
안서로 출사(出使)하는 원이를 송별하며
그리움
≪망천집≫
머리말을 덧붙임
맹성요
문행관
녹채
목란채
궁괴맥
유랑
난가뢰
백석탄
죽리관
신이오
망천에서 한거(閑居)하며 배적에게
여흔과 배적의 방문을 받고
배적의 작은 누대에 올라서
화감사(化感寺) 담흥상인의 산원(山院)을 찾아서
장마 진 망천장에서
재미스레 망천 별장에 적다
산장의 가을 저녁녘
전원의 즐거움
남전산 석문정사
산중에서
망천 별장을 떠나며
초가을 산중에서
장 소부에게
가을밤에 홀로 앉아
보리사에 갇혀 있으며 배적에게
흰 눈 내린 겨울밤 호 거사의 집을 생각하며
미편년시(未編年詩)
위수(渭水) 가의 농가(農家)
송별
날씨 갠 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불볕더위에 허덕이며
근위병의 아내
향적사를 찾아서
봄날의 산사(山寺)
우공곡(愚公谷)
농가(農家)
황보악의 운계(雲谿)
새 우는 산골 개울
연꽃 만발한 뱃도랑
가마우지 나는 제방
부평초 가득한 못
홍모란
잡시
눈앞의 경물(景物)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9월 9일 고향의 형제들을 그리며
홀로 타향에서 나그네 되어 있으매
명절 때마다 육친을 그리는 정이 배가(倍加)되나니
아득히 알겠구나, 형제들 높은 산에 오른 그곳에
모두 수유 가지 꽂고 있건만 오직 한 사람 빠져 있음을!
九月九日憶山東兄弟
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遙知兄弟登高處
遍揷茱萸少一人
기수(淇水) 가의 전원 풍경
기수 가에서 한가로이 은거하는데
동쪽 들판엔 광활히 산 구릉 하나 없거니
서산의 해는 뽕나무 너머로 숨어들고
석양에 물든 강물은 촌락 사이로 밝다
목동은 마을을 향해 가고
사냥개는 사람을 따라 돌아가거니
고요를 즐기는 자가 달리 또 무얼 하리요?
사립문 낮에 닫고 한적함에 젖으리라
淇上卽事田園
屛居淇水上
東野曠無山
日隱桑柘外
河明閭井間
牧童望村去
獵犬隨人還
靜者亦何事
荊扉乘晝關
안서로 출사(出使)하는 원이를 송별하며
위성의 아침 비 가벼이 날리는 티끌을 적시고
객사에는 파릇파릇 버들 색 새로운데
권하노니, 그대 다시 한잔 술을 다 드소서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이제 다신 옛 친구 없으리니
送元二使安西
渭城朝雨裛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盡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산중에서
형계 시냇물 줄어 바닥 흰 돌 드러나고
날씨 차가워 어느덧 단풍잎도 드문데
한적한 산길에는 본디 비 내리지 않았건만
빈 산중의 짙푸름은 사람의 옷을 적실 듯하다
山中
荊溪白石出
天寒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