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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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구성
박은식이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집필하기 시작해 1915년 상해(上海)의 대동편역국(大同編譯局)에서 순한문으로 간행된 ≪한국통사≫는 범례·목차·서[갱생(更生)]·서언·삽화, 본문, 결론·후서·발[한진(韓震)]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총 3편으로 나뉜다. 제1편은 우리나라 지리와 역사의 대강을 2장으로 나누었다. 제2편은 총 51장으로 대원군의 섭정에서부터 러·일 전쟁과 열강의 이권 쟁탈까지의 내용을 서술했다. 제3편은 총 61장으로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에서부터 1911년 105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한반도 강점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었다.
‘혼(魂)’과 ‘백(魄)’
박은식은 국가와 역사의 관계를 정신적인 ‘혼(魂)’과 물질적인 ‘백(魄)’으로 구분하고, ‘정신’이 존속하고 불멸하면 비록 ‘형체’는 훼손되었더라도 때가 되면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의 물적 요소가 이미 멸망했다 하더라도 정신적 요소인 국사가 유지·존속되는 한 국가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일본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수난을 받아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됐지만, 국민들이 기필코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한국통사≫의 가치와 영향력
한국 근대사의 고전인 ≪한국통사≫는 한국 근대사를 일제의 침략 과정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의병의 항일 투쟁과 애국 계몽 단체의 교육 구국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주요 사건에 저자의 의견[按]을 붙여 논평했다. 그리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데 근대적 역사학의 방법을 도입해 역사를 비판하고 분석했다. 그럼으로써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고, 대내적으로는 국민들에게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는 한편 일제에게 침략당한 아픈 역사적 교훈을 통해 반성을 촉구하려 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혀 국내 반입이 금지되었지만,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 있는 한국인 동포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었다.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 투쟁 정신을 크게 고취함으로써 일본을 크게 당황시켰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와 함께 일본의 침략상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자료로서, 민족운동가가 복원한 민족주의 사학의 지표가 될 만한 저술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200자평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애국심으로 저술한 구한말의 역사서다. 대원군의 섭정부터 여러 열강의 탄압과 점령 과정, 주권을 상실하기까지 한국의 슬픈 역사를 민족주의자의 손으로 썼다. 한일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종합 서술해 당시의 시대 상황, 사학사적 의의를 생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수 있다. 제2편과 제3편을 중심으로 원서의 약 10%를 뽑아 옮겼다.
지은이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호는 겸곡(謙谷) · 백암(白巖)이며, 필명으로 무치생(無恥生) · 태백광노 ·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 · 백치(白痴)를 사용했다. 그는 한국 근대사상 격동기에 활동한 유학자, 근대 학교 운동의 선구자, 교육 사상가, 언론인, 역사가로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국내뿐만 아니라, 격동하는 중국으로 1911년 망명한 후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대내적으로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가 해체되면서 근대사회로의 태동이 시작되는 한편, 대외적으로 서구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우리의 자주 의식이 고양되는 때였다. 그의 생애는 제1기(1859∼1897)의 주자학 수학기, 제2기(1898∼1909)의 언론 활동과 계몽운동기, 제3기(1910∼1925)의 망명과 독립운동기로 나눌 수 있다.
박은식은 어려서부터 주자학을 배우며 성장한 주자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신(新)문화와 다양한 사상을 접하면서 주자학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陽明學)으로 학문적 전환을 결단했다. 그는 이러한 사상적 변화와 함께 1898년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그 후 경학원 강사,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하면서 교육 개혁에 관한 글을 쓰고,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했다. 1905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보호국으로 만들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이를 비판했다. 그는 이후 복간된 ≪황성신문≫에서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는 항일 언론 활동을 1910년 폐간될 때까지 펼쳤다. 또한 1906년 교육 계몽 단체인 서우 · 서북학회의 기관지 ≪서우≫ ·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논설을 써서 계몽 활동에 진력하고, 서우사범학교 · 오성학교 · 서북협성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에 힘썼다.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해 유교 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해 유교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에는 양명학 보급을 위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간행하고, 한문교과서 ≪고등한문독본≫을 저술했다. 병합 후에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의 집필을 위해 1911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의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했고,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그의 영향으로 대종교에 입교했다. 이때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을 집필했다.
1912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했다. 1914년에는 홍콩으로 가서 중국어 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다. 이 시기에 강유위(康有爲) · 양계초(梁啓超) · 당소의(唐紹儀)를 비롯한 중국혁명동지회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고, 망명 후에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를 간행했다. 상해에서 이상설(李相卨), 신규식,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또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강연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또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번역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했다.
박은식은 1919년 3 · 1운동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았다. 이때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9년 8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서울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으며, 대한교육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에 간행했다. 이후 ‘건국사’를 쓰고야 말겠다는 각오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11월 1일 서거했다.
옮긴이
최혜주(崔惠珠)는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서 한일 관계사를 전공해 석 ·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학 문학부 외국인연구원, 숙명여자대학교와 한양대학교의 학술연구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한국사론≫(1996), ≪한국 근대사와 고구려 · 발해인식≫(2005, 공저), ≪일본의 한국침략과 주권침탈≫(2005, 공저), ≪근현대 한일 관계와 국제사회≫(2007, 공저), ≪최남선 다시 읽기≫(2009, 공저),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2010, 공저), ≪여행의 발견 타자의 표상≫(2010, 공저), ≪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왜곡과 식민통치론≫(2010), ≪문교의 조선≫(2011, 편저)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일본 망언의 계보≫(1996), ≪일본의 근대사상≫(2003), ≪일본의 군대≫(2005), ≪조선잡기(朝鮮雜記)−일본인의 조선 정탐록≫(2008), ≪일본인의 조선관≫(2008), ≪조선인의 일본관≫(2008),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제국 일본의 교두보≫(2009), ≪인구로 읽는 일본사≫(2009, 공역), ≪일본 망언의 계보 개정판≫(2010),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2011), ≪아시아 · 태평양전쟁≫(2012), ≪한국통사 천줄읽기≫(2014), ≪식민지 조선과 일본≫(2015), ≪조선 시베리아 기행≫(2016) 등이 있다.
한말 ·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과 조선 사정에 관한 조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 근대사상사, 한일 관계사, 재조 일본인의 활동과 조선 인식,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차례
서
서언(緖言)
제1편
대원군의 섭정
경복궁의 중건
서원 철폐
재정 개혁
천주교를 엄금함
프랑스군을 크게 이김
미국 함대를 물리침
일본의 외교 교섭과 정한론
대원군의 하야
병자수호조약
일본과의 통상조약
임오군란
청·일 양군의 움직임
일본인의 요구
청·일 양군의 주둔
유럽 열강과의 통상조약
갑신정변
조·일의 한성조약
청·일의 천진조약
러시아 세력의 전개
대원군의 귀국
방곡령 사건
정치의 부패
갑오동학란
청군을 요청한 전말
일본군의 입성
일본 공사의 건의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
청·일 교섭
청·일 개전
갑오개혁
잠정 합동 조약과 공수동맹
청·일의 평양 대전
청·일의 시모노세키조약
3국 간섭과 요동반도 반환
열강의 중국 군항 분할
오토리가 가고, 이노우에가 오다
일본인의 명성황후 시해
지방 의병
아관파천
러시아 세력의 신장과 열강의 이권 쟁탈
러·일 협약
철도 부설권을 외국인에게 인가함
제2편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3차 러·일 협약
일본이 광산을 빼앗음
일본인의 어업권과 포경권 점령
일본인이 송도 인삼을 도둑질함
영·일 동맹과 러·프 협약
만·한 문제와 러·일 교섭
일본군의 서울 입성과 한·일 의정서 체결
이토가 한국 대사로 부임
허위 격문과 일본 헌병이 한국인 집회를 금지함
일본의 우리 군대 감축
영·일 동맹의 개정
이토가 특파대사로 한국에 옴
이토가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함
≪황성신문≫의 봉쇄와 사장의 구금
매국을 성토한 상소
최익현의 격문
일본인이 고종 황제를 감시·통제함
군항 점령과 북간도 문제
동양척식회사의 침탈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
이토가 고종에게 선위하라고 협박함
정미 7조약의 성립
군대 해산과 박승환의 순국
민긍호 의병
한국인의 교육을 말살함
한국인의 산업이 전무하게 됨
장인환·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함
육군·사법부 폐지와 소네 아라스케 2대 통감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살해함
이재명이 이완용을 찌름
한·일 병합
120인의 투옥 사건
결론
한국통사 후서(後序)
한국통사 발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갑자년(1864)에서부터 신해년(1911)까지의 역사를 총 3편 114장으로 나누어 서술해 이를 ‘통사(痛史)’라고 했지만 감히 정사로 자리 잡을 수 없다. 다만 우리 동포들이 국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절대로 이를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