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고산 윤선도는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대 시가 문학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창작한 시가 작품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의 작품은 기존의 강호 시조에서 나타나는 면모와는 다르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관념화된 자연의 면모가 아닌, 눈으로 보는 실제의 자연을 작품에 형상화함으로써 강호 시가의 흐름에서 새로운 단계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울러 윤선도의 다양한 작품들에서는 강호 자연에서의 생활에 대한 자족감과 그로 인한 고양된 흥취가 적절히 발현되고 있다. 바로 이런 면모가 윤선도를 조선 시대 시가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인이다.
≪고산유고(孤山遺稿)≫는 6권 6책으로 이뤄진 고산 윤선도의 문집으로, 그의 시조 작품은 이 중에서 권지육(卷之六) ≪별집(別集)≫의 ‘가사(歌辭)’라는 항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실려 있는 작품은 모두 76수인데, <만흥> 제6수와 <어부사 여음>은 동일 작품을 항목을 달리해 배열한 것이다. 따라서 윤선도의 시조 작품은 현재 모두 75수가 전하고 있으며, 각 작품마다 제목을 붙인 것이 특징이다. 이는 제목을 통해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에는 창작 연대와 장소를 밝히고 있지만, 일부 작품에는 해당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먼저 작품에 부기된 창작 연대에 따르면 맨 뒷부분에 수록된 <견회요>와 <우후요>가 가장 먼저 창작되었고, 바로 그 앞에 있는 <몽천요>가 가장 나중에 지어진 작품이다. 가장 뒷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견회요>와 <우후요>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은 대체로 창작 시기에 따른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다.
4음보격 3행시라는 형태적 특성을 지닌 시조는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기에,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갈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작품에 사용된 표현이 특정 전고(典故)를 수반하는 경우, 그 유래와 배경 등에 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작품의 이해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 아무리 현대어로 번역을 잘한다고 해도 작품을 풀어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현대 독자들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는 조선 시대와 현대의 교육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은 사서(四書)를 비롯한 유가의 경전과 중국의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전고가 포함된 다양한 시가의 표현들이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는 상식화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현대 독자들에게는 그러한 표현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고, 때로는 그에 수반된 배경 지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각 작품마다 현대역과 원문으로 된 작품과 함께 가급적 상세한 해제와 주석을 덧붙였다. 해제는 일차적으로 작품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하되 작품 이해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내용을 포함했다. 주석 역시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표현이라도 개별 작품마다 붙이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며, 가능한 상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러한 해제와 주석으로 인해 윤선도의 시조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0자평
낯익은 <어부사시사>, <오우가>를 비롯해 고산 윤선도의 시조 75수를 모두 실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을 읽노라면 눈앞에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지고 절로 흥취가 일어난다. 윤선도가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 시대 시가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은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시조 작가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는 약이(約而)이며, 호(號)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다. 1612년 26세의 나이로 진사(進仕)에 급제했고,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1616년 당시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병진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유배지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의 시조를 창작했다. 1618년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 대사면령이 내려 유배에서 풀려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갔다. 남인(南人)에 속했던 윤선도는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유배를 떠나는 등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42세(1628)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해, 당시 이조판서이던 장유(張維)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47세 때인 1633년에 다시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에서 생활하던 무렵,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향족(鄕族)과 집안의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이미 적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피해 잠시 머물던 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이후 윤선도는 자연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다.
52세 때인 1638년에는 병자호란 당시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不奔問)’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게 된다. 이후 해남에 돌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차남에게 맡겼으며, 1640년부터 해남의 금쇄동에 거처를 마련해 은거했다. 이후 10여 년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보길도와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나이 56세 때인 1642년에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연작 18수의 시조 작품을 창작했으며, 2년 후에는 <산중속신곡> 2수와 <증반금> 등의 시조를 짓기도 했다.
윤선도가 63세 되던 1649년 인조(仁祖)가 승하하고, 세자로 있던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했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지낸 바 있었기에, 이해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요체를 논한 <기축소(己丑疏)>를 올렸다. 1651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다. 66세가 되던 1652년에는 왕의 특명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때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는 별장에 머물면서 <몽천요> 3수를 창작했다. 하지만 이내 효종에 의해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조정에 나아갔고, 당시 권신인 원두표(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해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7년(71세)에는 조정에 불려 갔다가 다시 관직에 제수되었고,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해 왕릉을 정하는 산릉의 간심(看審)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인을 대표한 논객으로 예송(禮訟)에 참여했다가 패배해,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에 의해 1650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1665년(79세)에는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백운산 아래의 옥룡동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2년 후인 1667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에 있는 거처 낙서재(樂書齋)에서 운명해, 해남의 금쇄동에 묻혔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윤선도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부로 있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효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보다는 유배지 은거지에서 지내야만 했으며, 반대 당파의 비방에 결연하게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해박했으며, 의약과 복서 및 지리 등에도 널리 통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6권 6책)가 있다. <어부사시사>·<오우가> 등 75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작품들로 인해 ‘자연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옮긴이
김용찬(金墉鑽)은 전라북도 군산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18세기 가집 편찬과 시조 문학의 전개 양상>이다. 한중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거쳐, 2008년부터 순천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1년 여름부터 1년간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UBC) 아시아학과의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주로 고전 시가에 관한 논문과 저서들을 쓰고 있지만,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을 포함한 한국 문학 전반에 걸쳐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공 분야의 연구 논문을 쓰는 것과 함께, 고전 문학 작품을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풀어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의 책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밖에도 영화와 책에 관한 리뷰(review)들을 다양한 지면에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현대역과 해제는, 금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 가은이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급적 쉽게 서술했음을 밝혀 둔다.
차례
산중신곡
만흥 1
만흥 2
만흥 3
만흥 4
만흥 5
만흥 6
조무요
하우요 1
하우요 2
일모요
야심요
기세탄
오우가 1
오우가 2, 물
오우가 3, 돌
오우가 4, 소나무
오우가 5, 대나무
오우가 6, 달
산중속신곡 2장
추야조
춘효음
고금영
고금영 발문
증반금
초연곡 2장
초연곡 1
초연곡 2
파연곡 2장
파연곡 1
파연곡 2
어부사시사
봄노래 1
봄노래 2
봄노래 3
봄노래 4
봄노래 5
봄노래 6
봄노래 7
봄노래 8
봄노래 9
봄노래 10
여름 노래 1
여름 노래 2
여름 노래 3
여름 노래 4
여름 노래 5
여름 노래 6
여름 노래 7
여름 노래 8
여름 노래 9
여름 노래 10
가을 노래 1
가을 노래 2
가을 노래 3
가을 노래 4
가을 노래 5
가을 노래 6
가을 노래 7
가을 노래 8
가을 노래 9
가을 노래 10
겨울 노래 1
겨울 노래 2
겨울 노래 3
겨울 노래 4
겨울 노래 5
겨울 노래 6
겨울 노래 7
겨울 노래 8
겨울 노래 9
겨울 노래 10
어부사시사 발문
어부사 여음
몽천요 3장
몽천요 1
몽천요 2
몽천요 3
몽천요 발문
번몽천요
견회요 5편
견회요 1
견회요 2
견회요 3
견회요 4
견회요 5
우후요(雨後謠)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견회요 4
산은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크고 크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뫼 길고 길고 믈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뜯은 만코 만코 하고 하고
어듸셔 외기러기 울고 울고 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