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우선 서문과 짧은 프롤로그가 나오고, 세 장이 매우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뒤따라 나온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열 개의 절이 뒤따르는데, 여기서 니체는 자기 작품들의 생성 배경, 근본 주제, 핵심 주장 등을 출판된 시간 순서에 따라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강력한 파토스가 담긴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특히 그는 ‘차라투스트라’에서 ‘디오니소스’로 의미를 확장해 나아가는 방향에서 각 작품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네 번째 장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에서 니체는 자신의 영웅적인 위대함을 강력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과 세계사적 위기를 결합하면서 현재와 다른 ‘인간의 세계’에 관해 새로운 미래를 예견한다. “나는 내 운명을 안다. 언젠가 내 이름이 어떤 엄청난 것에 대한 회상과 접목될 것이다−지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위기에 대한, 가장 심원한 양심들의 충돌에 대한, 이제까지 믿어져 왔고 요구되어 왔으며 신성시되었던 모든 것에 대항해 거부를 불러일으키는 결단에 대한 회상과 접목될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그 제목에서 이 자서전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려 준다. 제목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본래 기독교 ≪신약성서≫에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가 가시관을 쓴 예수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요한복음> 19장 5절). 이 말을 통해서, 한편으로 니체는 자신과 예수의 고난적인 삶을 관련지으려 한 것처럼 보인다. 니체는 여러 신체적인 병들로 인해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아무도 그를 이해해 주거나 인정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왜곡 없이 제대로 이해되기를 바랐지만 그야말로 시대의 외면을 받은 고독한 방랑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제목은 자신과 예수를 대결시키려는 목적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줄에서 니체는 하나의 대립적인 명제를 내놓는다. “나를 이해했는가? −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9절). 니체는 자신을 디오니소스라고 부르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존재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라는 이 두 존재의 대결이 니체 철학의 핵심을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과 세계와 실재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이로부터 도피하려는 모든 형이상학, 종교, 도덕, 학문을 총칭하는 기호일 것이다. 반대로 삶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부정하는 것에 맞서 삶에 대해 영원히 긍정하는 것, 다시 말해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고통과 무시무시한 시련과 두려움조차도 이겨 내고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 이것이 디오니소스를 나타낸다. 이러한 디오니소스는 바로 비극의 신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비극 정신의 강함과 위대함을 보았다. 이러한 비극 정신의 강한 생명력과 창조성이 인간의 위대함과 불멸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자평
니체가 직접 쓴 자신의 ‘철학적 자서전’이다. 자신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니체에 관해서나 니체의 작품들, 또는 니체 철학에 대해서 기본적인 윤곽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입문서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가장 근본적인 핵심들이 이 책에 요약되어 있다.
지은이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독일의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인 뢰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 나움부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에 다녔는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입학해 1858년부터 1864년까지 학업을 계속했다.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특히 고전어와 독일문학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864년 졸업 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머니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 지나 신학 공부를 중단했다. 그 후 리츨 교수 밑에서 고전문헌학을 배웠고, 이듬해에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1865년에 그는 우연히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한동안 그의 염세주의 철학에 매료되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 지평을 넓혔고, 나중의 ≪비극의 탄생≫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1869년,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위촉되었다. 이해에 트립셴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 긴밀한 우정을 나누었다.
1872년에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썼다.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몰락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니체의 초기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데, 당시의 고전문헌학자들은 혹평을 했다.
1873년과 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다. 그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비판을 담고 있다.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바그너에 대한 숭배 분위기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한 후 결국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년 아포리즘으로 구성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어 바젤대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요양하면서 저술에 전념하는데, 1881년 ≪아침놀≫, 1882년 ≪즐거운 학문≫, 1883∼1885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6년 ≪선악의 저편≫, 1887년 ≪도덕의 계보≫를 출판하고, 1888년 ≪바그너의 경우≫, ≪안티크리스트≫를 출판하고,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등을 저술했다. 1889년 1월 3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기절한 후 10여 년간 정신 질환을 앓다가 1900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옮긴이
이상엽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철학, 정치학, 사회학을 공부했고 <허무주의와 초인(Nihilismus und Ubermensch−Friedrich Nietzsches Versuch eines neuen menschlichen Lebens ohne Transzendenz)>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울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니체 철학에서 특히 미학, 윤리학, 정치학 등을 연구하고 있다. 니체의 미학 연구는 서양 미학사에서 어떤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대 예술과 미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다. 그리고 니체의 윤리학 연구는 현대의 탈도덕적인 사회현상 속에서 어떻게 바람직한 주체의 윤리학을 모색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것이다. 또한 니체 철학과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및 소피스트의 수사학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현대의 다원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식론과 소통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표에서다. 한편 지멜, 카시러, 하이데거 등 20세기 초 독일 철학자들의 근대성 이해와 근대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극복 방안 등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디어에 대한 사유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철학의 전환점≫(공저, 프로네시스, 2012), ≪문화 및 문화 현상에 대한 철학적 성찰≫(공저, 씨아이알, 2002), ≪역사철학, 21세기와 대화하다≫(충남대출판부, 2015), ≪니체와 소피스트≫(지식을만드는지식, 2015)가 있고 최근 논문으로는 <미디어철학−프랑크 하르트만을 중심으로>(2011), <귄터 안더스의 종말론적 미디어철학>(2011), <니체와 아곤의 교육>(2013), <니체의 근원적 허무주의>(2013), <삶의 관점에서 본 비극의 의미>(2015) 등이 있다.
차례
서문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는 나쁜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고 독일인의 피는 거의 섞이지 않은 순수한 폴란드 귀족이다. 내가 나와 가장 심하게 대립되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비천한 본능을 찾게 되면, 언제나 내 어머니와 여동생을 발견하게 된다−이러한 천민들과 내가 친족이라고 믿는 것은 나의 신성함(Göttlichkeit)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11쪽
차라투스트라라는 유형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생리학적 전제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 그 전제는 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개념을 가장 훌륭하게 그리고 개인적으로 설명한 곳은 이미 내가 설명해 놓았던 ≪즐거운 학문≫의 5권의 마지막 절이다. “새로운 자, 이름 없는 자, 이해하기 어려운 자인 우리는−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다−아직 증명되지 않은 미래의 조산아인 우리는, 새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새로운 수단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건강을, 이전의 어떤 건강보다도 더 힘세고 더 빈틈없고 더 강인하고 더 대담하고 더 쾌활한 건강을 필요로 한다.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