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의 구성
1993년에 출간된 ≪중심 옮기기: 문화 해방을 위한 투쟁≫에는 총 21편의 발표문 혹은 에세이가 주제에 따라 4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옮긴이는 이 책의 각 장에서 중요한 글을 발췌하여 그 내용 전체를 번역했다. 따라서 본 번역본에서는 1장에서 3편, 2장에서 2편, 3장에서 3편, 4장에서 1편 등 총 9편의 발표문 혹은 에세이의 전문을 소개하고 있다.
응구기 사상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
응구기는 아프리카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정치적·경제적 자존의 달성과 함께 문화적 해방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난 4백 년간 몇몇 서구 국가의 문화에 의해서 전 세계의 문화가 정치적·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민족주의, 인종, 계급, 성별(gender) 등의 경계를 넘어 세계 각지의 다양한 지역으로 문화의 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문화적 해방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아프리카의 언어로 글쓰기를 제시한다. 진정한 아프리카 문학의 전통을 수립하고 나아가 아프리카가 문화적으로 해방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일은 아프리카의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중심 옮기기’의 두 가지 의미
첫째는 서구 세계라는 가상적 중심으로부터 모든 세계 문화의 다양한 위치로의 중심 옮기기의 필요성이다. 서구에 있다고 가정된 전 세계의 중심은 유럽 중심주의, 즉 몇몇 서구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정과 같은 맥락에서 작용한다.
중심 옮기기의 두 번째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오늘날, 남성이면서 인종적 소수인 유럽 중심주의 부르주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서구를 포함한 전 세계에 대한 지배로부터 벗어나 양성, 인종, 종교 평등의 조건하에서 국내의 모든 소수 계급 조직으로부터 일하는 사람의 진정한 창조적 중심으로 중심 옮기기의 필요성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국내와 국가 간,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중심 옮기기는 민족주의, 계급, 인종, 성별을 구속하는 장벽으로부터 세계의 문화를 해방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200자평
자국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망명 중인 응구기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발표한 강연과 에세이 가운데 핵심적인 것만 추려 모았다. 그에 따르면 아프리카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정치적·경제적 자존의 달성과 함께 문화적 해방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해방을 위해선 아프리카 언어로 글쓰기가 중요하다. 이 책에 나타난 응구기의 사상은 다원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하게 인류 사회를 조망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지은이
응구기 와 시옹오(Ngũgĩ wa Thiong’o)는 1938년 케냐 중부 고원 지역 리무루(Limuru)의 카미리수(Kamĩrĩĩthũ)에서 태어났다. 케냐 내 최대 민족 집단인 기쿠유(Gĩkũyũ) 출신이며, 평범한 농부인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의 자식 중 다섯째다. 영국 식민지 시대 케냐의 일류 중등학교였던 얼라이언스(Alliance)를 졸업한 후, 우간다의 마케레레(Makerere)대학과 영국의 리즈(Leeds)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65년부터 케냐의 일간지 <네이션(Nation)>의 기자로 일하다가, 1970년 신문사를 떠나 나이로비(Nairobi)대학교 문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1977년과 1978년 사이에는 정치적 이유로 재판 없이 1년간 투옥되었다. 결국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1982년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미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아프리카 문학을 강의했고, 1993년에는 뉴욕대학교 교수가 된다.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이며, 동 대학 내의 국제 저술 및 번역 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Writing and Translation) 소장을 맡고 있다.
응구기는 마케레레대학 시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작품은 ≪검은 은둔자(The Black Hermit)≫(1962)라는 희곡으로서 아프리카 전통 사상과 서구 문명의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를 그리고 있다. 그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1964년에 발표된 ≪아이야 울지 마라(Weep not, Child)≫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교육을 통한 사회적 성공을 꿈꾸지만 결국 식민지 현실에 부딪쳐 좌절하고 만다. 이후 ≪사이로 흐르는 강(The River Between)≫(1965), ≪한 톨의 밀알(A Grain of Wheat)≫(1967) 등의 소설을 발표한다.
1977년에 발표된 ≪피의 꽃잎(Petals of Blood)≫에는 이전의 작품과 다른 면모가 보인다. 이 작품 이전의 주제는 아프리카 전통과 서구 문명 간의 갈등, 식민지 현실에서 고통 받는 개인의 삶 등이었으나, ≪피의 꽃잎≫에서는 작가의 사회주의 사상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은 세 명의 자본가들이 살해당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독립 이후 부패한 케냐의 자본주의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 응구기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자신의 모어인 기쿠유어로만 작품을 쓰게 된다. 이에 앞서 1976년에는 자신의 기독교식 이름인 제임스 응구기(James Ngugi)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1977년 자신의 고향인 리무루의 카미리수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결혼하고 싶을 때 결혼해요(Ngaahika Ndeenda)>라는 기쿠유어 연극을 상연한다. 이 작품 역시 외국 자본과 결탁한 케냐의 자본가가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연극 공연은 케냐 정부에 의해 강제로 중단되고, 응구기는 1년간 옥고를 치른다. 1980년에 그의 첫 번째 기쿠유어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Caitaani Mutharabaini)≫가 출판되는데, 이 소설 역시 자본가의 횡포를 희극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응구기는 망명 중에 두 번째 기쿠유어 소설 ≪마티가리(Matigari ma Njiruungi)≫(1987)를 발표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마티가리는 식민지 시절 백인에게 대항하는 무장투쟁에 가담했던 인물로서 독립 이후 케냐 사회의 부패상을 목격하고 실의에 빠진다. 최근에는 세 번째 기쿠유어 소설 ≪까마귀의 마법사(Muroogi wa Kigogo)≫(2003)가 출판되었다.
응구기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고 있으며, 1974년에는 로터스상을, 2001년에는 노니노국제문학상(Nonino International Literary Prize)을 수상했다. 한편, 응구기는 1996년 옥스퍼드대학교의 클래런던 강의(Clarendon Lecture), 1999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애시비 강의(Ashby Lecture) 등을 맡아 탈식민주의, 서구 문화 중심주의 탈피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한 바 있다.
옮긴이
박정경은 1972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9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어과에 입학해 아프리카 문학 연구에 첫발은 내딛었고,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아프리카 문학 전공 석사과정을 2000년에 마쳤다. 이후 케냐의 나이로비대학교 문학과에서 수학해 2004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스와힐리어와 아프리카 문학 관련 강의를 맡으면서 동대학교의 아프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서문
I. 유럽 중심주의로부터 문화 해방시키기
1. 중심 옮기기: 문화의 다원주의를 지향하며
2. 백 송이 꽃이 필 공간 창조하기: 공통 세계 문화의 부(富)
4. 언어 제국주의: 영어, 세계의 언어인가?
Ⅱ. 식민주의의 유산으로부터 문화 해방시키기
7. 신식민국가의 작가
10. 식민주의 이후 정치와 문화
Ⅲ. 인종주의로부터 문화 해방시키기
14. 인종주의 이데올로기: 평화를 위한 국내외의 전쟁
15. 문학에서의 인종주의
19. 자유를 향한 오랜 세월의 노정: 만델라의 귀향을 환영한다!
Ⅳ. 마티가리, 꿈과 악몽
21. 마티가리, 통합된 동아프리카에 대한 꿈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 모든 논의에서 발생한 것이 ‘중심 옮기기’라는 주제다. 수록된 글과 제목의 기저에 깔려 있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중심 옮기기를 논하고 있다. 그 첫째가 서구 세계라는 가상적 중심으로부터 모든 세계 문화의 다양한 위치로의 중심 옮기기의 필요성이다. 서구에 있다고 가정된 전 세계의 중심은 유럽 중심주의(Eurocentrism), 즉 몇몇 서구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가정과 같은 맥락에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