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최인준 작품집
2410호 | 2015년 1월 20일 발행
최인준의 초판본 <암류>
이훈이 엮은 ≪초판본 최인준 작품집≫
겨울은 멈추지 않는다
두터운 얼음장 밑으로, 깊은 땅속에서 암류가 흐른다.
개구리의 동면은 봄을 부르고 삶의 열정은 급하게 소용돌이친다.
그때가 되면 사랑이 움트고 자연은 비약한다.
형―형이 온 것이다. 온다고 하던 형이 기어코 오고야 말은 것이다. 형에 대한 증오가―그러나 륙 년 만에 처음 맞나는 형에게 증오로 대한다는 것은 넘우 심한 짓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형과 동생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섰수.”
한마듸 하고 룡이가 고개를 숙이였다.
“응! 잘 있었니.”
눈이 벍애진 철이도 한마듸 하고 얼골을 돌리였다.―서로 어색해서 할 말을 못하였다.
룡이가 웃목에 앉었다. 그리고 어머니 머리맡에 앉은 형을 얼골에서 몸으로 믁믁히 바라보았다. 양복 입은 형―그 입은 양복에 침울한 눈초리가 오래 동안 멈으렀다.
‘이제 무엇하려!’
‘느젔다!’
≪초판본 최인준 작품집≫, <암류>, 이훈 엮음, 25∼26쪽
어떤 장면인가?
공부하러 서울에 갔던 형 철이가 싫증이 났다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6년 만의 형제 상봉이다.
룡이는 철이 싫은가?
모든 불행이 형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떤 불행인가?
집안은 몰락하고 아버지는 죽었다. 애타게 큰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병들어 자식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룡이 자신은 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돈이 없어서 사랑하는 임순이와 결혼도 못한다.
정말 철이 때문인가?
룡이는 그렇게 생각한다. 철이를 서울로 보내 공부시키기 위해 땅을 팔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소작농이 되면서 학비를 보내기는커녕 그날그날의 생활조차 힘들어졌다.
아버지의 죽음도 그런가?
“기우러진 가운(家運)을 다시 회복하려고 륙십이 가까운 아버지가 힘에 부치는 일을 밤낫으로 하며 애썼기 때문에 그만 지처서 죽고 말었다. 실상 아직도 이십 년을 더 살 수 있었든 것이다.”
어머니의 병은?
“아버지가 죽은 그다음 해 녀름 어머니가 우연이 병들어서 마츰내 반신불수가 되였다. 그 ‘우연’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필연성’을 가지였다. 너무 오금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정말 철이 때문인가?
사실 집안을 일으키도록 강요받은 것은 철이의 책임이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없게 대물림되는 가난의 사슬 또한 그의 책임이 아니다. 기러기 아빠의 자살이 자식의 탓이 아닌 것처럼, 결혼율과 출산율 저하가 젊은 세대의 탓이 아닌 것처럼.
그럼 누구의 탓인가?
아버지가 필연적으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 그 무엇, 바로 가난이다. <암류(暗流)>에서 가난은 물질적 궁핍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생존의 선택을 필연적으로 규정하는 운명의 다른 이름이다.
룡이는 왜 그 사실을 모르나?
현재가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수발을 들어도 어머니의 건강은 나빠지기만 한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도 소작 빚만 늘 뿐, 결혼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절망은 적개심과 분노를 낳고, 이들은 공격 대상을 찾는다. 가장 손쉬운 것이 가까이 있는 형이다.
형제는 화해할 수 없는가?
철이는 고향에 정착하려 하지만 육체노동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동생의 약혼녀 임순이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후 자살한다. 룡이와 임순이는 죄책감에 제각각 “개고리처럼” 자신의 방 안에 틀어박힌다.
개구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리한 겨울을 땅속에 기어들어 가서 먹지도 않고 굶지도 않고 가사 상태(假死狀態)의 수면을 계속하는 개고리처럼 그들도 하는 일 없이 방 안에만 가치어서 몸을 쪼꾸리고 다리를 펴지 못하고 겨울을 지내가야” 한다. 그러나 “개고리의 수면이 장차 올 봄의 서곡(序曲)을 알외일 것을 약속하는 것처럼 그들의 이러한 ‘생활양식’도 역시 장차 올 봄의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봄은 어떻게 오는가?
“봄은 아직도 멀다.” 그러나 “겨울은 결코 고정(固定)되어 있지 않다”. “겨울의 암류(暗流)가―어름장 속으로 땅 속으로 급하게 급하게 소용도리를 치면서 흐”르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속에도 ‘정열의 암류’가 급하게 흘러가고 있다. 자연이 새로운 비약을 예고(豫告)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정열의 비약’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이 움트는 봄을 기다려 마지않는다”.
최인준은 누구인가?
동반작가다.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황소>가 당선되고, <신동아>에 <암류>가 가작 입선되면서 정식 등단했다. 한국 전쟁 때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글을 썼나?
농촌 현실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일제 치하 농촌의 가난하고 비참한 삶과 사람들의 고통을 핍진하게 그려냈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도 역시 현실 적응에 실패한 인텔리 소시민을 다뤘다.
이 책에는 어떤 작품을 실었나?
위에 인용한 <암류(暗流)>를 비롯해 <상투>, <이른 봄>, <춘잠(春蠶)>, <약질(弱質)>, <호박>, 이렇게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을 실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 역사적 형상화에 기여한 작품들이다.
당신은 누군가?
이훈이다. 경희대학교에서 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