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드거 앨런 포는 미국 현대문학의 주류로서 시인이자 단편소설가, 편집자이자 비평가이며, 미국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일인이다. 치밀한 극적 설계를 통하여 우울한 낭만주의적 정서와 인간 내면의 심연을 심미적으로 그려낸 포가 미국에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에 대해 열광적 반응을 보인 것은 유럽의 작가들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마르셀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 아서 코넌 도일, 쥘 베른 등이 포에게 푹 빠졌다. 포는 호러, 미스터리 작가뿐 아니라 SF와 판타지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 말라르메, 발레리 등 프랑스 상징주의 작가들이 포에게 열광했다. 특히 보들레르는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데 평생을 바쳤으며 자신의 대표시집인 ≪악의 꽃≫을 포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보들레르가 보기에 ‘견딜 수 없는 광대한 감옥’이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원고를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포야말로 ‘근대문학의 침울한 하늘에 떠 있는 일등성(一等星)’이었다. 그렇게 포는 열병에 걸린 듯한 천재 작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몬티야도 술통>
추종을 불허하는 아이러니의 교묘한 조작으로 인해 의심의 여지없이 포의 공포소설 가운데 최고 수작으로 꼽힌다. 일인칭 주인공 화자의 태연자약한 목소리, 압축된 문체, 습기 찬 지하 납골당, 화강암 벽과 쇠사슬, 희생자의 어릿광대 의상까지 모든 요소들이 공포의 분위기와 긴장의 창출에 기여한다.
<검은 고양이>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주인공을 화자로 삼은 최초의 작품 중 하나다. 알코올중독으로 인하여 전락해 가는 주인공은 정신적 불안 상태가 더욱 극심해져 동물을 학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내에게까지도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된다.
<절뚝발이 개구리>
광인 왕으로 알려진 프랑스 샤를 6세의 광기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불의 축제’를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서 끌어와 모티프로 삼아 창작했다. 극악무도한 왕은 별명이 절뚝발이 개구리인 난쟁이 광대를 옆에 두고 가학적인 게임을 통해 쾌감을 얻고자 한다. 절뚝발이 개구리는 기회가 닿자 게임을 빙자해 멋들어지게 끔찍한 복수를 감행한다.
<구덩이와 추>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지하 감옥 자체가 죽음이 임박한 극한 상황을 보여 준다. 도입부의 종교 법정에 대한 묘사부터 독자는 일인칭 화자의 끔찍한 곤경에 함께 빠져든다. 독자는 그때부터 연이은 고문의 동반자가 되지만, 죽음 외에 주인공이 빠져나올 방법은 없는 듯 보인다.
<고자쟁이 심장>
작품의 소재는 ‘악마의 눈’(Evil Eye)이라는 민간의 미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자는 다만 피해자인 노인의 눈이 기분 나빠서 범죄를 저지른다. 살인자를 고발하는 건 죽은 자의 살아서 박동하는 심장이 아니라 죄의식에 두려워하는 자신의 양심이다.
<어셔 가의 몰락>
늪가에 지어진 오래된 고딕풍의 저택에서 칩거하는 쌍둥이 남매 로더릭 어셔와 누이동생 매들린 어셔. 동생은 만성적 무감각 상태에서 발작증을 앓고 있어 점점 야위어 간다. 어느 날 밤 여동생이 죽자 로더릭은 시체를 관에 넣어 지하실에 가매장하는데…. 며칠 후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는 밤에 매들린이 피투성이가 되어 책을 읽고 있던 오빠 앞에 나타나 쓰러져 죽고 이에 로더릭 또한 너무 놀란 나머지 맥없이 쓰러져 숨을 거둔다.
<리지아>
윤리학, 물리학, 수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매우 박식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인, 리지아. 그런 리지아가 병에 걸려 죽음에 임박해 있다. 그녀는 격렬한 눈빛을 발산하며 자신의 죽음에 맞서 대항하지만 숨지고 만다. 리지아가 죽고 주인공은 새로운 여인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강렬한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혀 새로운 여자를 리지아로 착각하는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윌리엄 윌슨>
도플갱어를 소재로 도입하여 정체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두 윌리엄 윌슨이 동일인물의 두 반쪽인지, 실제로 별개의 존재인지 불분명하지만 그래도 효과는 동일하다. 화자의 분열된 정체성은 우리에게 심각한 공포를 야기한다.
<적사병의 가면무도회>
역병의 와중에 부유한 시민들이 성으로 피신해 연신 성대한 가면무도회를 연다. 외부 역병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축하하기 위함이다. 적사병으로 분장한 사람을 보고 다들 아주 재밌는 사람이라며 웃고 박수를 치지만 그는 실제로도 적사병이다. 적사병은 그들 모두와 함께 춤을 추고 모두를 죽인다.
<베러니스>
사촌인 베러니스에 대한 화자의 사랑은 처절하리만치 강렬하다. 애착의 매개물은 희고 상아색으로 빛나는 치아다. 죽은 베러니스를 생각하며 그는 그녀의 치아를 한순간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한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서재에 놓인 탁자 위의 상자 안에 든 흰 것은 바로 그가 무덤을 파고 산 자의 입에서 뽑아낸 치아였다.
<모르그 가의 살인>
가상의 장소인 파리의 모르그 거리에 위치한 한 주택의 밀실에서 발생한 모녀 살인 사건을 다룬다. 포가 창조한 명탐정 오귀스트 뒤팽이 첫 출연하여 명석한 추리로 사건을 해결해 내는데, 진범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고릴라 족의 오랑우탄으로 판명난다. 사람이 아닌 동물 살인이라는 기발한 착상이 주목할 만하다.
<도난당한 편지>
프랑스의 왕궁에서 한 귀부인이 자신의 거실에서 D 대신의 방문을 받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중요한 편지가 절취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제3의 인물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한 채 당한다. 그 편지를 되찾기 위해 사건을 파리 경찰국장에게 의뢰하나 끝내 오리무중이자 급기야 명탐정 뒤팽이 나서 해결해 준다. 경찰의 허를 찌르는 뒤팽의 추리와 분석 능력이 단연 돋보인다.
<범인은 너다>
래틀버러의 지역 유지이며 재력가인 바너버스 셔틀워디 노인이 실종 사망한다. 유력한 용의자로는 희생자의 조카로 법적 상속자지만 상속 여부가 불확실해진 페니페더가 지목된다. 또 다른 용의자로는 6개월 전 이곳에 홀연히 나타나 셔틀워디에게 접근해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올드 찰리다. 올드 찰리의 완전범죄를 노린 조작과 이를 간파한 ‘나’의 역조작이 숨 막힐 듯한 긴장 속에서 보이지 않는 팽팽한 대립을 펼친다.
200자평
보들레르가 ‘근대문학의 침울한 하늘에 떠 있는 일등성(一等星)’이라 일컬은 광인 천재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70여 편 중 공포·환상·추리 분야의 대표작 13편을 골라 실었다. 그는 장르에 관계없이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심리 변화를 과학적인 추론을 통해 분석하고 논증하려 했다. 또 죽음, 공포, 불안, 우울 등 괴기적이고 환상적인 것들을 소재로 하여 복잡한 내면의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엮은이
에드거 앨런 포는 1809년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채 한 살도 되기 전에 집을 떠났으나 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도 세 살 때 결핵으로 잃고 말았다. 이로 인해 어린 포는 성공한 담배 사업자인 존 앨런 집에 입양되었다. 양부모를 따라 1815년 영국 런던으로 갔다 5년 후 리치먼드로 돌아왔다. 버지니아대학교에 입학하여 10개월 후 퇴학했다. 이후 도박과 음주로 빚을 많이 지고 양부모와 불화를 겪다가 군에 입대했다. 1833년부터 생활을 위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836년 열세 살짜리 조카인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다.
1845년, 그는 ≪이브닝 미러≫에 시 <까마귀>를 발표하여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1847년 그의 아내 버지니아가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궁핍, 음주, 광기, 마약, 우울, 신경쇠약으로 점철된 불안한 삶을 살다 1849년 10월 7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에서 인사불성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즉시 공립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곧 사망하여 40년의 가난과 술과 실연의 일생을 마감했다.
옮긴이
김정민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버펄로(SUNY-Buffalo) 영문학과에서 토니 모리슨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너새니얼 호손, 윌리엄 포크너, 토니 모리슨에 대한 신역사주의 연구방법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구 논문으로는 <Back to the Past: A New Historicist of American Romances>, <Correlation between Fiction and Reality: A New Historicist Reading of American Romances> 등이 있다. 현재 세종대, 광운대, 서울과기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차례
그로테스크
아몬티야도 술통
검은 고양이
절뚝발이 개구리
구덩이와 추
고자쟁이 심장
아라베스크
어셔 가(家)의 붕괴
리지아
윌리엄 윌슨
적사병 가면
베러니스
미스터리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도난당한 편지
범인은 너다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우리가 악행이나 우행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단지 법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을 어기려는 경향을 갖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심술궂은 성미가 결정적으로 나를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검은 고양이>
나는 다시 눈길을 머리 위로 돌렸다. 그 순간 나는 그만 황당하고 어리벙벙해졌다. 그 추의 진동 폭이 거의 일 야드나 늘어나 있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속도도 한결 빨라졌다. 더욱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 추가 두드러지게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는 점이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양쪽 끝이 초승달 모양의 번쩍거리는 강철로 되어 있었다. 양쪽 끝은 위로 향해 있고 길이는 1피트 남짓이며 아래쪽 끝은 면도칼처럼 날이 서 있었다. 이것을 목격한 후 내가 얼마나 공포에 질렸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것이 크고 육중해 보이는 데다 끝은 날카롭고 위쪽은 점점 더 단단하고 넓어졌다는 점에서도 면도날과 비슷했다. 그 물체는 무겁게 생긴 놋쇠 봉에 매달려 있었고, 그 구조물 전체가 허공에서 진동할 때마다 쉿 하는 소리를 냈다.
−<구덩이와 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