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는 문학사에 저자로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을 쓴 사람은 빌헬름 바켄로더(Wilhelm Heinrich Wackenroder, 1773∼1798)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 얇은 책은 원래 1796년 가을, 1797년 날짜로 인쇄되어 익명으로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 이 출판사는 1796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이 책과 똑같은 형태로 출판했다. 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가 1799년 1년 전에 죽은 친구 바켄로더의 유고를 정리해서 ≪예술에 관한 환상들(Phantasien uber die Kunst)≫이라는 책으로 편집할 때 원저자의 이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은 오랫동안 완전히 뒷전에 머물러 있었다. 티크는 자신의 초기 낭만주의 소설들로 각광을 받았고, 공개적으로도 이 책의 저작자로서 명성을 혼자서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젊은 쇼펜하우어조차 바켄로더의 말을 그대로 인용할 때 티크의 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가 가장 강조하는 점은 바로 예술가의 “열광(Enthusiasmus/Begeisterung)”이다. 라파엘로의 경우 마돈나를 그릴 때 꿈에서 계시를 받고 그림을 완성하는데, 이처럼 예술가의 열광이란 ‘신적인 것’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바켄로더는 <라파엘로의 환상>에서 바로 이러한 예술가의 영감과 열광을 강조한다. 일반인들이 얻을 수 없는, 천재적인 예술가만이 얻을 수 있는 하늘로부터의 영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괴테의 초기 시에서 강조하는 예술의 “수호신(Genius)”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술가의 열광을 통해서만 신이 창조한 자연과 감정적으로 교감할 수 있고, 예술가의 심장을 “타오르게(gluhen)” 해서 예술 작품을 창작하게 만든다고 괴테는 주장했던 것이다. “나는 내 영혼으로 들어오는 마음속의 어떤 그림에 의지해 그린다”는 라파엘로의 고백은 이런 예술가의 고양된 감정, 숭고한 감정, 신과의 영적인 교류를 통해 영감을 얻고 있음을 말해 준다. 즉, 라파엘로의 영혼 속에 떠오르는 성모의 모습이 꿈에서 보았던 성모의 모습과 일치되어 라파엘로의 그림에 “천상적인” 성모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 바켄로더는 라파엘로에게 “신과 같은 라파엘로(Der Gotterliche Rapfael)”라는 칭호를 붙인다.
바켄로더는 이런 천재들에 의해 탄생한 예술을 거의 종교와 같은 수준에 올려놓으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태도와도 연결 짓는다. “예술은 그 사람 위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 신성한 사람들의 훌륭한 작품들을 단지 감탄하고 존중할 수만 있으며,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감정들을 녹여서 정화하기 위해 우리 마음 전체를 그 작품들 앞에서 열어 놓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종교 자체가 되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 위에 떠도는 것”을 예술만이 “신의 불꽃”의 중계자로서 “우리의 감정 안으로”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바켄로더는 주장한다. 이런 논리로 바켄로더는 진정한 예술의 향유를 기도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아주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신처럼 변용된 관조의 순간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둔다. 아름다움의 비밀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정교하게 고안해 낸 규칙으로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 규칙으로 예술 작품을 기계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영혼을 불어넣은 열광적인 “예술 정신”은 파악할 수 없다. 그 예술 정신은 예술가의 위대한 인간성을 매개로 ‘초월적인 것(das Transzendente)’을 숨김없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켄로더는 예술이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종교적 사랑이 되거나,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사랑하는 종교가 되어야 하네.” 예술가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도 “마음속 깊이” 예술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깊은 신앙 없이는 아무리 천재적인 예술가도 이런 신의 계시를 작품에 표현할 수 없으며,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도 똑같은 신앙심이 없으면 그 예술 작품에 표현된 신의 계시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각각의 예술에 그분에게서 나간 하늘의 섬광이 인간의 가슴을 거쳐 그 작은 창조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다시 위대한 창조주를 향해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신다.” 바켄로더는 예술에 대한 경건함을 주장하는 이런 이상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과 15, 16세기의 독일 예술에서 전개되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보다 옛 시대의 예술 시대를 발견하려 했던 후기 낭만주의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고, 많은 낭만주의자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자평
18세기 말 독일, 모든 것을 이성으로 해석하려는 계몽주의와 형식 위주의 고전주의에 반발해 새로운 문화가 꽃핀다.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하고 중세 독일 문화를 부흥시켰다. 독일 낭만주의의 시작이다. 이 문화 혁명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바켄로더와 티크의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다. 당시 예술계에 종교 붐을 불러올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작품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지은이
루트비히 티크와 빌헬름 하인리히 바켄로더는 베를린 출신으로 동갑내기였다. 티크는 1773년 3월 31일에 그리고 바켄로더는 6월 13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티크의 아버지는 밧줄을 만드는 장인(匠人)이었고, 바켄로더의 조상은 신학자, 교수, 법률가와 같은 학자들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은 15세기에 후스(Hus, 1372∼1415, 체코의 종교 개혁가)파 전쟁 때문에 체코의 모라비아에서 이주해 북독일 포메른(Pommern)에 정착했다고 한다. 바켄로더의 아버지는 1748년에야 베를린으로 와서 곧 프로이센의 높은 관직까지 올라갔다. 아버지는 깔끔한 일처리와 사려 깊은 마음씨, 엄격하면서도 부드럽고 조심스런 행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는 규칙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송가(頌歌) 시인이었던 람러(Karl Wilhelm Ramler, 1725∼1798)와 친했는데, 아들인 바켄로더는 그로부터 문학의 기본 개념들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점차 그로부터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예술적 성향이 낯설었고, 그에게 철저하고도 광범위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와 함께 성악과 바이올린 그리고 작곡을 공부하는 데도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였다. 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다. 아들을 엄하게 교육해서 그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대학을 다니지 못하게 하고 베를린에서 1년간 배석 판사한테서 교육받게 했다. 할레(Halle)와 괴팅겐에서 이미 대학 공부를 하고 있던 티크와 헤어지게 된 것도 바켄로더에게는 고통스런 일이었다. 1792년 4월부터 1793년 3월까지 서로 교환했던 편지들이 이들의 우정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기록물이 되었다. 이 편지들은 문학에 대한 두 사람의 관심뿐만 아니라 연극과 음악에 대한 관심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바켄로더의 영혼 속에서 이미 “천상의 황홀함”과 인간들의 평범함 사이에서 벌이는 전쟁을 예감케 해 주고 있어 그의 성숙한 판단력에 대한 감탄을 자아낸다. 정서가 불안정해서 고약한 행동을 자주 했던 티크에 비해 바켄로더는 훨씬 성숙했던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어느 수도사의 심정 토로≫가 출판되고 1년 후인 1798년 2월 13일 바켄로더는 장티푸스로 죽었다. 그는 좋아하는 예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지도 못했고, 싫어하는 직업을 수행해야 하는 현실을 체력적으로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이상이 성취되는 작품을 쓰는 것이, 다시 말해서 예술에 축복받은 삶을 그려 보는 것이 그의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새로운 영역에서의 예술 체험이 바켄로더에게는 진지했으며, 그런 삶을 살려고 했고 그렇기 때문에 죽었다. 그는 이렇게 떳떳하게 말해도 될 것이다. ‘나는 신을 찬미하기 위해 새로운 제단을 세웠다’고 말이다. 바켄로더의 추종자들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심정 토로”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그의 채워지지 않은 동경은 그래도 여러 사람을 깨워서 이끌어 줄 것이다.
옮긴이
임우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로 있으며, 한국괴테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기획조정처장과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대학생을 위한 독일어 1, 2≫(문예림, 공저), ≪서양문학의 이해≫(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공저), ≪세계문학의 기원≫(한울아카데미, 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지식을만드는지식),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낭만주의≫(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공역), 라테군디스 슈톨체의 ≪번역이론 입문≫(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공역), 니콜라스 보른의 ≪이별연습≫(월인), ≪민중본. 요한 파우스트 박사 이야기≫(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미학연습. 플라톤에서 에코까지. 미학적 생산, 질서, 수용≫(동문선, 공역), ≪괴테의 사랑. 슈타인 부인에게 보낸 괴테의 편지≫(연극과 인간)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흔들리는 호수에 비춰보는 자기 성찰. 괴테의 시 <취리히 호수 위에서>>(2014) <괴테의 초기 예술론을 통해 본 ‘예술가의 시’ 연구. <예술가의 아침 노래>를 중심으로>(2013), <‘자기변신’의 종말: 괴테의 찬가 <마부 크로노스에게>>(2011), <“불행한 사람”의 노래: 괴테의 찬가 <겨울 하르츠 여행>(1777)>(2008), <영상의 문자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소설에 나타난 ‘겹상자 문장’ 연구>(2007), <괴테의 ≪로마 비가(Romische Elegien)≫에 나타난 에로티시즘>(2007),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 나타난 ‘체념(Entsagung)’의 변증법>(2004), <괴테의 초기 송가 <방랑자의 폭풍 노래> 연구. 시인의 영원한 모범 핀다르(Pindar).>(2002), <괴테의 초기 시에 나타난 신화적 인물 연구>(2001), <새로운 신화의 창조-에우리피데스, 라신느, 괴테 그리고 하우프트만의 ≪이피게니에≫ 드라마에 나타난 그리스의 ‘이피게니에 신화’ 수용>(1997) 등이 있다.
차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라파엘로의 환상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
생존 시 널리 유명했던 화가이자 롬바르드 유파의 일인자 프란체스코 프란차의 특이한 죽음
연습생과 라파엘로
피렌체의 젊은 화가 안토니오가 로마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
재주가 많으면서도 학식이 깊은 화가의 전형. 피렌체 유파의 유명한 시조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에서 소개함
두 가지 그림 묘사
예술에서 일반적인 것, 관용 그리고 인간애에 대한 몇 마디
우리의 존경하는 조상 알브레히트 뒤러의 명예를 기념하며
놀라운 언어 두 가지와 그 신비한 힘에 대해
피렌체파(派)의 옛 화가 피에로 디 코시모의 특이성에 대해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세상의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자기 영혼의 안녕을 위해 이용해야 하는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위대함
로마에 있는 어느 젊은 독일 화가가 뉘른베르크에 있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
화가들의 초상화
화가들의 연대기
음악가 요셉 베르크링거의 이상한 음악적 삶 1, 2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외로운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멀리 떨어진 세계를 어렴풋이 생각하며 다음의 글들을 조금씩 써 갔습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예술을 매우 사랑했고, 이 사랑은 마치 소중한 친구처럼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나와 함께 계속 동행해 주었습니다. 내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마음의 충동에 북받쳐 이 회상들을 적어 나갔던 것을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은 관대한 눈으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들은 요즘 어조로 적혀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오늘날의 어조에 익숙지 못하고,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런 어조를 좋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